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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궁녀’는 조선시대에 처음 등장”…부여군이 역사왜곡 바로잡기 나선 이유보니

중앙일보

입력

'삼천궁녀', 조선 성종때 시조에 등장

백제 역사에서 유명한 표현 중 하나는 ‘삼천궁녀’이다. 그런데 삼천궁녀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조선 9대 왕인 성종(1469∼1494)때다. 그때까지 삼천궁녀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문헌이나 자료는 없었다. 결국 궁녀가 3000명이라는 말은 거짓일 가능성이 크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충남 부여 부소산성 낙화암에서 바라본 백마강. 중앙포토

충남 부여 부소산성 낙화암에서 바라본 백마강. 중앙포토

충남 부여군이 백제역사 바로 잡기 사업에 나섰다. 부여군은 18일 “백제 역사를 다시 쓴 책 3권을 오는 2월 출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책은 ▶사비 시대를 연 성왕과 사비도성(1권) ▶불국토의 나라와 유려한 백제문화(2권) ▶백제와 함께한 의자왕(3권) 등이다.

책 집필에는 성정용 충북대 교수와 권오영 서울대 교수, 정재윤 공주대 교수, 김낙중 전북대 교수, 신희권 서울시립대 교수 등 국내 백제사 전문가 40명이 참여했다. 부여군은 4억 원을 들여 2020년 1월부터 집필 작업을 해왔다. 부여군 관계자는 “왜곡된 백제사를 바로 세우고 올바른 역사 인식을 정립하는 데 이들 책이 도움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잘못된 역사의 대표적 사례는 삼천궁녀다. 삼천궁녀는 조선 성종 때 문인(文人)인 김흔의 시조에 처음 언급된다. 김흔은 시조에서 ‘삼천 궁녀들이 모래에 몸을 맡기니’라고 표현했다. 명종 때 문신인 민제인도 '백마강부'란 시조에 ‘구름 같은 삼천궁녀 바라보고’라고 썼다.

반면 조선 시대에 편찬된 각종 지리지에는 낙화암, 삼천궁녀 표현이 보이지 않는다. 역사학자들은 “‘삼천’은 ‘많다’는 뜻으로 역사적 근거가 없는 단지 수사적 표현에 불과하다”며 “시적 수사로 표현된 허구임이 드러난 것”이라고 말했다.

"백마강 조룡대 전설도 사실 근거 약해" 

부여군 백마강(금강) 낙화암 옆모습. 중앙포토

부여군 백마강(금강) 낙화암 옆모습. 중앙포토

이와 함께 백마강(금강) ‘조룡대’ 관련 전설도 사실에 근거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조룡대는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칠 때 백마를 미끼로 용을 낚아 백마강을 건넜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조룡대는 삼국유사에서 ‘용암(龍巖)’으로 표현하고 있다.

부여군 관계자는 “백제의 번창과 강력한 수호를 상징하는 용이 패망의 증거물로 잘못 사용된 것 같다”며 “승자가 자신들의 전과(戰果)를 내세우고, 유민들의 백제 재건에 대한 의지를 꺾기 위한 상징·조작 측면이 강해 보인다”고 했다.

백마강 '낙화암(落花巖)'이란 명칭도 고려 때 역사책인 ‘제왕운기’에 처음 등장한다. 제왕운기는 고려 충렬왕 때인 1287년에 출간됐다. 조선 시대 편찬된 각종 지리지에는 낙화암이란 표현이 나오지 않는다.

"의자왕은 대담하며 결단력 있어" 

‘방탕하거나 권력 농단을 일삼는 폭군’으로 알려진 의자왕 이미지도 상당히 왜곡된 것으로 전해진다. '삼국사기'·'구당서' 등에 따르면 “의자왕은 웅걸한 모습에 대담하며 결단력 있고 부모에 효도하며 형제간 우애가 깊었다”고 기록돼있다.

부여군 관계자는 “의자왕이 방탕한 폭군이었다면 백제부흥운동에 3만여명이 호응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패망한 나라의 군주라는 이유로 부정적 이미지가 덧칠해진 것 같다”고 말했다.

부여 백마강 조룡대. 중앙포토

부여 백마강 조룡대. 중앙포토

박정현 군수는 “대학교 역사교재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하고 탄탄하게 집필했다”며 “단순히 군민에게 홍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개론서 이상의 가치를 지닐 수 있도록 만든 책인 만큼 역사학도를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널리 읽히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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