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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경호 논설위원이 간다

“기득권 양당체제 깨자” "전국민 철밥통시대 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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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민주노총이 주도하는 전국민중행동이 15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공원에서 민중총궐기 대회를 열고 있다. 집회 중간에 모금 행사가 있었다. 집회 사회자는 "요즘 현금 갖고 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이체할 수 있는 계좌번호도 바구니에 같이 넣어뒀다"며 "다음부턴 모바일 간편결제도 가능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서경호 기자

민주노총이 주도하는 전국민중행동이 15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공원에서 민중총궐기 대회를 열고 있다. 집회 중간에 모금 행사가 있었다. 집회 사회자는 "요즘 현금 갖고 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이체할 수 있는 계좌번호도 바구니에 같이 넣어뒀다"며 "다음부턴 모바일 간편결제도 가능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서경호 기자

15일 오후 2시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공원.
“불평등을 갈아엎자! 기득권 양당체제 끝장내자! 자주평등사회 열어내자!”
진보성향 단체들이 모인 전국민중행동이 주최한 ‘2022 민중총궐기 대회’의 공식 슬로건이다. 행사에는 주최 측 추산으로 1만5000여 명이 참가했다. 감염병예방법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을 위반한 미신고 불법 집회였다. 대규모 인원이 참여한 만큼 거리두기는 잘 지켜지지 않았다. 경찰이 공원 주변 곳곳에 배치됐지만 노조원 등의 집회 참가 자체를 막지는 않았다. 간간이 해산을 종용하는 경고방송만 이어갈 뿐이었다.

1·15 민중총궐기 대회에 가보니 #"문 정권 기대 배신,음침한 부정부패" #"재벌국유화, 전 노동자 정규직화를" #이제는 제도와 절차, 규범이 중요 #거리가 아니라 의회서 갈등 해결을

노래패 공연에 이어 개회가 선언됐다. 묵념하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민중의례가 끝나자 노동자·농민·빈민 대표의 발언이 이어졌다.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이 가장 먼저 단상에 올랐다. “디지털 전환, 기후 위기를 빌미로 양질의 일자리는 사라지고, 고용도 임금도 노조도 보장하지 않는 최악의 일자리만 생겨나는데 정부는 기업 걱정뿐입니다.” 양 위원장은 지난해 7월 민주노총 전국노동자대회를 열어 감염병예방법을 위반한 혐의로 그해 11월 서울중앙지법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박흥식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은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은 농민의 목숨을 자본가에게 팔아먹는 짓”이라며 “문재인 정부가 기어이 CPTPP 가입을 선언한다면 농민들의 준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영찬 빈민해방실천연대 공동대표는 “대장동 사건의 핵심은 악마의 개발사업을 위해 그곳에서 삶을 영유하던 철거민들의 피눈물로 자본의 배를 채운 것이지만 어디서도 철거민의 이야기는 단 한 줄도 나오지 않고 있다”고 했다.

‘민중총궐기’라는 명칭은 2015~2017년 민주노총을 비롯한 진보단체들이 7차례에 걸쳐 벌인 연합시위에서 왔다. 촛불 정부를 자임한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엔 집회를 자제하다가 2018년 12월 “말로만 노동을 존중한다고 하면서 공약조차 지키지 않는다”며 8차 집회를 열었다. 이번이 그 이후 3년 만의 9차 집회다. 현장에 직접 가보기로 한 건, 코로나19 확산 우려에도 진보단체들이 대규모 집회를 감행한 이유가 궁금해서다. 어떤 주장을, 왜 하는지 알고 싶었다.

 민주노총이 주도하는 전국민중행동이 15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공원에서 민중총궐기 대회를 열고 있다. 노조원 참석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서경호 기자

민주노총이 주도하는 전국민중행동이 15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공원에서 민중총궐기 대회를 열고 있다. 노조원 참석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서경호 기자

주최 측은 문재인 정부 5년의 성적표를 참담하다고 표현했다. 부동산 정책의 실패, 더 비참해진 비정규직의 삶 등을 근거로 들었다. 전국민중행동은 “2016년 촛불 광장에서 적폐를 청산한 뒤 촛불 정부를 자임한 문재인 정권에 기대했지만, 그들 역시 우리의 기대를 배신했다”고 했다. “들리는 것은 저열한 개인사요, 보이는 것은 음침한 부정부패뿐이다.”(전국민중행동 결의문) 현재 대선이 여야 유력후보 중에 골라야 하는 ‘강요된 선택’이라는 비판은 공감대가 적지 않다. 기득권 양당체제를 끝내자는 구호도 낯설지 않다. 대선에 출마한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와 심상정 정의당 후보도 자주 하는 말 아닌가.

하지만 딱 여기까지였다. 이런 과격한 발언이 나왔다. “재벌을 국유화해서 노동자 위해 쓰자. 그래서 국가 예산 1000조로 늘리고 일하는 모든 노동자들이 정규직 되자. 사회주의 해서 전 국민 철밥통 시대 열어가자.” 사회주의 좌파의 이백윤 대선 후보 연설이다. 사회변혁노동자당 소속 이 후보는 역시 진보정당인 노동당 대선 후보와의 경선을 거쳐 지난해 연말 ‘사회주의 대통령 후보’가 됐다.

물론 사회주의라는 단어에 과잉반응 보일 필요는 없다. 2003년 초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 시절, 전경련 임원이 외신 인터뷰에서 인수위에 대해 “사회주의적(socialist)”이란 표현을 쓰는 바람에 한때 시끄러웠다. 당시 기사를 쓴 외신기자는 “한국 사회의 민감한 반응에 놀랐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2022년 한국은 그때보단 성숙하다.

하지만 고작 “철밥통” 얘기로 사회주의를 선전하는 모습은 안타깝다. 더 멋진 말도 많은데 말이다. 미국의 1988년생 밀레니얼 청년 네이선 로빈슨은 『밀레니얼 사회주의 선언』에서 “사회주의는 인도주의적 공감에서 미래의 비전을 이끌어낸다”며 ‘사회주의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본능’이라고 했다. 실속도 강조한다. “좌파는 종종 비현실적인 몽상가로 치부되지만, 흥미롭게도 지난 몇 년간 사회적·경제적 문제의 가장 구체적인 해결책은 좌파에게서 나왔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익숙해졌지만 처음엔 도발적으로 다가왔던 무상급식·기초연금·아동수당 등은 정의당의 전신인 민주노동당이 제안해 결국 정책으로 실현된 진보 어젠다였다.

 민주노총이 주도하는 전국민중행동이 15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공원에서 민중총궐기 대회를 열고 있다. 한미동맹 해체를 주장하는 손팻말이 보인다. 서경호 기자

민주노총이 주도하는 전국민중행동이 15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공원에서 민중총궐기 대회를 열고 있다. 한미동맹 해체를 주장하는 손팻말이 보인다. 서경호 기자

15일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열린 '2022 민중총궐기 대회' 주변에 걸린 플래카드.

15일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열린 '2022 민중총궐기 대회' 주변에 걸린 플래카드.

15일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열린 '2022 민중총궐기 대회' 주변에 걸린 플래카드.

15일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열린 '2022 민중총궐기 대회' 주변에 걸린 플래카드.

자주 비판받아온 일부 단체의 친북 편향 주장은 반복됐다. 전국민중행동은 발족 선언문에서 “한미 동맹에 얽매인 채 남북합의(2018년 4·27 남북 정상합의)를 스스로 파기”했다며 ‘미국 예속’을 비판했다. 한미연합군사연습 영구 중단, 대북 적대정책 철회, 사드와 전략무기 도입 반대, 평화협정 체결, 자주적 평화통일 실현 같은 주장도 단골 레퍼토리다. 북한이 연일 미사일을 쏘아대는 상황에서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이런 식의 친북 평화 공세가 얼마나 공감을 얻을까.

이날 행사의 공식 주최자는 수십 개 진보단체가 모인 전국민중행동이었지만 사실상 민주노총이 주도했다. 노조원 참석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행사 보도자료를 배포한 곳도 민주노총이었다. 정부가 금지했는데도 집회를 강행한 이유를 묻자 한상진 민주노총 대변인은 “중앙 등 5개 보수언론의 취재는 공식적으로 거부하고 있다”며 “필요하면 배포된 자료를 인용해달라”고 말했다. 민주노총은 2018년 조합원 수 기준으로 처음으로 한국노총을 앞질러 제1 노총에 등극했지만 3년 만에 1위 자리를 다시 내줬다. 민주노총 조합원 수는 2020년 말 113만4000명으로 한국노총(115만4000명)보다 2만 명가량 적었다. 민주노총 사정을 잘 아는 노동계 인사에게 물어봤다.

-민주노총이 제2 노총이 됐는데.
“(민주노총은) 별로 개의치 않는다. 양대 노총 합해도 노조조직률이 11%밖에 안 되지 않나. 갈 길이 멀다.”
-한국노총은 정치권과 공조해 공공기관 노동이사제 도입을 주도했다.
“이미 일부 지방공기업에 도입된 제도다. 그동안 뭐가 그렇게 달라졌나. 큰 기대 하지 않는다.”
-민주노총 내부 정파가 국민파, 현장파, 중앙파로 나뉜다는데.
“쌍팔년도(오래전) 얘기다. 대중조직이니 다양한 그룹이 있을 수는 있다.”
-재계에선 현 정부를 친노동으로 본다. 노동계로 너무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불만이 많다.
“처음엔 우리도 기대했지만 아니었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도 결국은 자회사를 통한 구조조정으로 비정규직을 양산한 것이다. 중대재해법도 불충분하다. 기업은 힘들다고 엄살이지만 사람이 계속 죽어 나가는 상황이 바뀌지 않는 건 문제 아닌가. 최근 현대산업개발의 광주 아파트 붕괴사고만 봐도 예방효과가 크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원로 정치학자 최장집 교수는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는 촛불시위부터 시작됐다”고 말한다. 그 이후 집권한 민주당 정부가 역사 청산, 적폐 청산 같은 급진 슬로건을 내걸고 이전 사회의 성과와 보수세력을 전면적으로 부정했기 때문이다. “민주화 투쟁은 분명 관념적이거나 이상주의적이고, 낭만적이고, 변혁지향적인 ‘최대정의적’(maximalist) 민주주의의 이해방식을 발전시켰다. 현실의 경험적 생활세계를 뛰어넘어 이성적으로 정치와 사회를 디자인할 수 있다는 정서적 급진주의를 내면화하게 되는 조건이기도 하다.”(최장집 교수의 2019년 강연 ‘한국 민주주의의 공고화, 위기, 그리고 새 정치질서를 위한 대안’)

최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사회적 갈등 해결을 위한 정치의 중심은 거리가 아니라 다양한 색깔의 정당이 경쟁하는 의회에서 해결하도록 해야 한다. 그는 “운동에 의한 민주화 시대가 지나고, 민주주의의 제도와 절차, 그리고 그것을 운영하는 규범들을 통해 성숙하게 이끌어 나가야 하는 시대를 맞았다”고 했다.

집회가 끝나고 주최 측은 쓰레기봉투를 들고 공원을 청소했다. 주말 도심 대신 여의도공원을 택한 것도 좋은 선택이다. 앞서 소개한 네이선 로빈슨의 책에는 좌파가 성공하기 위한 조언이 담겨있다. “모든 사람과 잘 지내라. ‘빅 텐트’를 만들어라. 전도유망한 많은 좌파 운동을 파멸로 이끈 내부 분열을 피해라. 독단은 피하고 생각은 솔직해야 한다.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의제가 있어야 한다.”

2022년 1월 15일 민중총궐기에서 나온 구호 중엔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의제가 과연 얼마나 될까.

 민주노총이 주도하는 전국민중행동이 15일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민중총궐기 대회를 열고 있다.

민주노총이 주도하는 전국민중행동이 15일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민중총궐기 대회를 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