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생물 배워 뭐해" 이말에 충격…과학쌤은 코난 뺨치는 '부캐' 팠다 [별★터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자 힌트에요. 잘 들으세요. ‘불꽃놀이 시작! 빨리 놀아볼까’”
수수께끼를 꺼내는 남성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는 힌트를 줄 테니 자물쇠를 열 비밀번호 다섯 자리를 맞춰보라고 했다. 탐정 모자를 깊게 눌러 쓴 그의 손엔 고등학교 생물 교과서가 들려 있었다. ‘과학 문제일까’하는 생각에 한참을 고민했지만 기자는 답을 찾지 못했다. 백기를 든 기자에게 그는 정답 대신 “힌트를 더 드리겠다”고 했다.

“불꽃놀이는 알칼리 금속이 원소마다 다른 색을 내보이는 현상이에요. 빨간색 리튬, 노란색 나트륨, 보라색 칼륨이 재료들이죠. 쉽게 외우기 위해 학생들은 앞글자를 따서 ‘빨리. 노라(놀아). 보칼(볼까)’이라고 부르기도 해요.” 그러면서 리튬, 나트륨, 칼륨의 원자번호가  숫자 3, 11, 19이란 사실을 넌지시 일러줬다. 그제야 눈치챈 기자가 원자번호를 연이은 숫자 ‘31119’가 비밀번호냐고 묻자 그는 빙그레 웃었다. 지난 11일 국내에 유일한 ‘과학쌤’ 추리소설 작가인 윤자영(44)씨와의 강렬했던 첫 만남 순간이다.

드라마 보며 품은 교사의 꿈

윤자영씨는 특별한 작업실이 없다. 집이든 학교든 어디서든 노트북을 펴고 글을 쓴다고 했다. 사진 본인제공

윤자영씨는 특별한 작업실이 없다. 집이든 학교든 어디서든 노트북을 펴고 글을 쓴다고 했다. 사진 본인제공

언뜻 탐정 같아 보이지만 윤씨의 본업인 ‘본캐’는 고교 생물교사다. 교육자 집안에서 자란 그는 드라마 '호랑이 선생님'을 매번 챙겨봤다고 했다. 아이들과 울고 웃는 극 중 선생님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가장 흥미 있는 과목인 과학을 가르치며 아이들과 만나야겠다는 꿈을 품었고 2005년 꿈은 현실이 됐다. 교단에 섰다는 기쁨에 열정을 불사르던 그에게도 위기가 왔다. 2014년 믿었던 사람에게 실망하면서 심한 마음고생을 했다. 회의감에 휩싸인 그를 달래준 건 학교 도서관 서가에 놓인 추리소설이었다. 한 장씩 넘기던 책장이 어느덧 수십권으로 늘었고 ‘나도 써보고 싶다’는 갈망이 생겼다고 한다. 매일 1시간씩 일찍 일어나 노트북을 두드리는 게 일상이 됐다.

“생물은 배워서 이렇게 쓴다”

2019년 윤자영씨가 고3학생들과 찍은 한컷. 윤씨가 학생들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여학생들의 눈 감는 모습을 따라해보는 모습이다. 사진 본인제공

2019년 윤자영씨가 고3학생들과 찍은 한컷. 윤씨가 학생들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여학생들의 눈 감는 모습을 따라해보는 모습이다. 사진 본인제공

소일거리에 그칠 줄 알았던 ‘습작 생활’이 부업이 된 건 우연한 계기였다. 한 학생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던진 한마디가 가슴을 울렸다. “생물을 배워서 어디에 쓰냐” 는 질문에 순간 ‘뇌 정지’가 왔다고 했다. 핀잔을 주고 넘어갈 법도 했지만, 수업시간에 배운 지식을 활용하는 상황을 보여주면서 흥미를 끌어내 보기로 했다. ‘10년 차 생물쌤’의 이야기 창작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의 이야기 속 주인공은 탐정에 가까웠다. 과학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을 토대로 미궁에 빠진 사건을 하나씩 풀어나갔다. 여장 남자를 잡아낸 에피소드가 대표적이다. 귓속 털 과다증은 그 유전자가 Y염색체에 있어 보통 남성에게만 나타난다. 이 점에 착안해 귓속에 털이 많은 여성이 실은 여장 남자였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이야기를 만들어 ‘유전’을 설명했다. 미맹의 원리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 피티시(PTC) 용액이 살인에 사용되는 이야기를 차용하기도 했다. 시큰둥하던 아이들이 하나둘 반응을 보였고 생물 시간만 기다린다는 아이들도 생겼다고 한다.

윤자영 교사(왼쪽에서 세번째)가 교과서 속 과학 지식을 활용해 추리소설을 쓴 자율동아리인 '사이언픽션' 회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 본인 제공

윤자영 교사(왼쪽에서 세번째)가 교과서 속 과학 지식을 활용해 추리소설을 쓴 자율동아리인 '사이언픽션' 회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 본인 제공

노파심이 사그라들자 자신감이 붙었다. 추리소설 작가에 도전장을 냈다. 수학여행에서의 의문의 살인사건을 다룬 『십자도 시나리오』를 펴냈다. 하지만 첫술에 배부르긴 어려웠다. “습작소설 수준”이란 악평이 돌아왔다. “잠도 못 자고 쓴 소중한 소설인데…” 불평하면서 그만둘 수도 있었지만 응원해주던 가족과 학생들의 얼굴이 아른거렸다고 한다.

시간을 쪼개 공부를 시작했다. 과거 코난 도일부터 최근 히가시노 게이고까지 추리소설이라면 닥치는 대로 찾아서 읽었다. 수십 권을 독파해보니 눈이 뜨였다. 추리소설만의 공식이 보였다. 생각나는 대로 글을 쓰고 고치던 습관을 버렸다. 개요와 등장인물을 완벽하게 구성하기 전까진 펜을 들지 않았다. 그렇게 펴낸 단편선 『습작 소설』로 한국추리작가협회 계간 미스터리 신인상을 거머쥐었다. 그렇게 ‘부캐’로서의 삶을 연 그는 어느덧 10여년간 11개의 장·단편을 내놓은 다작 작가가 됐다.

본캐·부캐 모두 놓지 않는 게 목표 

윤자영씨 뒤로 그가 받은 한국추리문학상 신예상, 대상, 신인상 상패가 놓여 있다. 사진 본인제공

윤자영씨 뒤로 그가 받은 한국추리문학상 신예상, 대상, 신인상 상패가 놓여 있다. 사진 본인제공

“애들 가르치면서 소설을 쓸 시간이 있나” 평소 윤씨가 자주 받는 질문이다. 본캐인 교사를 소홀히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에 그는 “그렇지 않다”며 딱 잘라 말했다. 최근 급격히 달라지는 교육환경에 맞게 여러 실험을 하고 수업에 적용한 점을 근거로 든다. ‘학생 라면 세포’와 ‘핵형분석 우산 만들기’가 대표적이다.

“아이들이 다양한 재료로 라면을 만들면서 세포소기관을 익힐 수 있게 했고 핵형분석 결과를 우산에 담아내게 했어요. 이 과정을 블로그에 연재하고 있는데 많은 선생님이 수업에 도움이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2018년 과학기술정보통신부로부터 올해의 과학교사로 뽑힌 것도 이런 점을 고려한 것 같다는 게 윤씨의 말이다. 그는 “교사 일은 동적이고 작가 일은 정적”이라며 “서로 다른 성격이라 덜 헷갈리고 병행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웃었다.

윤씨의 신간 『교통사고 전문 삼비 탐정』은 드라마 제작을 앞두고 있다. 연일 상한가를 치고 있지만 윤씨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했다. 자신을 어떤 별이라고 생각하느냐는 ‘별★터뷰’의 질문에 그는 ‘초신성’이라고 했다. 폭발한 뒤 강력한 블랙홀을 만드는 초신성처럼 “내 안의 모든 능력을 폭발해 존경받는 교사와 명작을 쓰는 추리소설가로 남고 싶다”는 게 그의 소망이다. “본캐도 부캐도 모두 놓고 싶지 않아요. 쉽지 않지만 둘 다 최고가 되고 싶거든요. 혹시 저와 같은 길을 가려는 제자가 나온다면 응원해주고 싶습니다.”

★톡 그래픽=전유진 기자 yuki@joongang.co.kr

★톡 그래픽=전유진 기자 yuki@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