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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수소폭탄과 휴대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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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장하석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과학철학

장하석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과학철학

인류가 자초한 사상 최대의 재난이었던 2차 대전은 원자폭탄이라는 끔찍한 신무기를 선보이면서 끝났다. 미국은 독일보다 먼저 만들어야 한다고 원자탄 개발을 서둘렀는데, 그 작업이 끝나기도 전에 독일이 항복하니 그 대신 일본에 핵폭탄을 투하했다. 그 이후 많은 나라가 원자탄을 개발했지만 사용한 적은 없다. 서로 핵무기를 쓰기 시작하면 다같이 멸망한다는 것이 명백하므로 사용을 자제하게 되는 ‘공포의 균형’이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 균형이 잘못 깨지면 핵전쟁으로 인류가 몰락할 위험은 항시 존재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 무서운 원자폭탄도 부족해서 세계의 강국들은 너도나도 수소폭탄을 개발했다. 미국에서 또 앞장서서 1952년에 성공적 실험을 하였으며, 그 후 소련, 영국, 프랑스, 중국 등이 앞다투어 만들어냈다. 수소폭탄의 파괴력은 일본에 떨어뜨렸던 원자폭탄의 1000배를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수소폭탄은 전략적으로 별 쓸모가 없다. 원자폭탄만 있어도 공포의 균형은 충분히 이룰 수 있다. 수폭을 맞으면 안 되지만 원폭 정도는 괜찮다고 하는 나라는 없기 때문이다.

전략적으로 무용지물인 수소폭탄
윤리적 우려, 기술 성취에 묻혀
휴대폰·유전공학도 무모하게 개발
가능한 기술 모두 개발해야 하나

수소폭탄 개발은 미국에서 처음에 많은 반대에 부닥쳤다. 그러한 무기의 사용을 정당화할 수 있는 상황은 없으므로 발명하는 것 자체가 윤리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주장이 넓은 공감대를 형성했다. 또 수소폭탄은 기술적으로 대단한 난제였다. 거기에 필요한 과학적 원리는 잘 알려져 있었다. 수소의 원자핵들을 융합시키면 많은 에너지가 배출되고, 그것을 연쇄반응 시켰을 때 걷잡을 수 없는 양의 에너지가 나온다. 그런데 실제로 그 융합 반응이 시작되게 하려면 지구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엄청나게 높은 온도와 압력이 필요하다.

만들 수 있는 가능성도 확실치 않은 사악한 물건을 개발하고자 거액을 들이고 국력을 소모하는 프로그램을 시작하자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었다. 그렇다면 수소폭탄을 개발하자는 주장이 어떻게 해서 결국 우세하게 되었을까? 가장 중요한 요인은 기가 막힌 기술적 아이디어가 나왔던 것이다. 단순히 말해본다면, 원자폭탄을 써서 수소폭탄을 점화하자는 것이었다. 먼저 원자폭탄을 터뜨림으로써 수소의 핵융합에 필요한 고온, 고압의 상태를 이루어 낸다는 디자인이었다. 그 아이디어를 듣자마자 많은 과학자들은 무릎을 쳤다. 순식간에 수소폭탄은 기술적 불가능이 아니라 ‘기술적 필연성’을 띠게 되었고, 윤리적으로 강경히 반대하던 사람들도 이 ‘기술적으로 달콤한’ 해결책을 알게 된 후 더 이상 반대할 기력을 잃었던 것이다.

이 역사의 저변에 깔린 것은, 가능한 기술이면 무조건 개발할 수밖에 없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이다. 군비경쟁 맥락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 쓰이는 기술도 그렇게 생각없이 개발되어 인간의 삶을 지배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휴대폰은 참으로 훌륭한 발명품이다. 그 덕에 위기상황에서 구조받는 경우도 많으며, 옛날 같이 안타깝게 약속이 엇갈리는 일도 없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다들 의아해 하겠지만 휴대폰으로 인터넷을 접속할 수 있게 만든 것은 큰 실수였다. 인터넷도 물론 큰 이득을 주는 발명품이지만 하루 24시간을 거기에 매달려 있는 것은 여러가지 폐해가 있다. 정말 필요할 때만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을 쓰는 것이 적당하다. 인터넷뿐 아니라 원하는 오락물, 인간관계까지 휴대폰으로 항상 손에 들고 다니며 참을성도 기대감도 상상력도 없이 원할 때마다 즉시 즉시 나타나게 하는 것은 좋은 삶의 형태가 아니다.

그런 부작용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없이, 기술을 부릴 수 있는 것만이 너무나 신기하고 자랑스러워서 경쟁적으로 개발했고, 소비자들은 또 거기에 혹해서 그 물건의 큰 시장을 만들어주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에도 사람들은 윤택한 삶을 할 수 있었다. 그게 지금은 상상이 가지 않을 것이다. 필자는 스마트폰 없이 고집을 부리며 살았었는데, 작년 코로나 사태 중 고국을 방문하게 되면서 격리에 필요한 앱을 설치하느라 결국 마련했다. 그 이후 여러가지로 얽혀 들어가 이제 스마트폰을 없앨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삶이 더 만족스러워진 것은 하나도 없다.

휴대폰뿐만 아니라 인공지능, 유전공학, 우주개발 등등 여러 첨단 분야에서 이렇게 맹목적으로 가능성을 추구하면서 이루어지는 일이 많다. 유전공학으로 변화시킨 돼지의 심장을 사람에게 성공적으로 이식했다는 뉴스가 들린다. 기술적으로 가능하다고 해서 그렇게까지 몇 년 더 살아야 할까? 현대의 인간은 가능한 일은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것 같다. 영국의 등반가 조지 맬러리는 왜 에베레스트 산에 올라가려고 하냐고 누가 물으니 “그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런 극한적 도전을 통해 인간 능력의 한계를 시험해보는 것은 진취적 기상이라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어떤 여파를 가져올지 모르는 새로운 기술을 가능하다고 해서 앞뒤를 재지 않고 무조건 개발하는 것은 자제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자제는 인간 해방의 중요한 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