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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정호의 시시각각

깐부 할배 오영수의 ‘괜찮은 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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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연극 '라스트 세션'에서 정신분석학을 창시한 프로이트로 나오는 오영수. [사진 파크컴퍼니]

연극 '라스트 세션'에서 정신분석학을 창시한 프로이트로 나오는 오영수. [사진 파크컴퍼니]

팩트 체크 하나. ‘깐부 할아버지’ 오영수(78)의 데뷔작은 영화 ‘갯마을’(1965)일까. 지난해 ‘오징어 게임’ 돌풍이 불 당시 일부 언론과 온라인 뉴스에 보도된 내용이다. 사실부터 말하면 틀렸다. 옛날 흑백영화를 되돌려봤다. 배우 오영수를 찾을 수 없었다. 김수용 연출, 신영균·고은아 주연, 1960년대 문예영화를 대표하는 이 작품의 원작자가 소설가 오영수(1909~79)다. 소설가 오영수의 장남이 판화가 오윤(1946~86), 배우 오영수는 소설가 오영수의 아들뻘이다.
 재미난 사실도 알게 됐다. 소설가 오영수는 아들 친구인 화가 오수환(76)을 친아들처럼 아꼈는데, 젊은 시절 꼭 이런 부탁을 했다고 한다. 겉멋을 부리지 않는 “장인이 되게!”였다. 미술평론가 황인이 중앙선데이에 소개한 대목이다. 혹시 이 당부가 배우 오영수에게 전달되지 않았을까. 물론 기자의 상상이다. 최근 골든글로브상을 타며 때늦은 전성기를 맞이한 그에게 ‘연기 장인’만큼 어울리는 말도 없을 것 같아서다.

연기생활 반세기의 유쾌한 지혜
이 시대 청춘에 보내는 메시지
‘이상한 놈’ 넘치는 세상 돌아봐

 오영수의 수상 소감이 가슴에 박혔다. “생애 처음으로 나에게 ‘괜찮은 놈이야’라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은 알겠는데 ‘괜찮은 놈’은 다소 낯설다.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은, 뭔가 독특한 친근감이 느껴진다. 노래 ‘썸’에 빗대면 보통인 듯, 보통 아닌, 보통 같은 놈이다. 자신감과 자멸감의 절묘한 균형이다.
 그 ‘괜찮음’은 어디서 오는 걸까. 오영수의 경우 말과 행동의 일관성에서 비롯하는 것 같다. 반세기 넘는 배우생활에서 반짝반짝 조명은 받진 못했지만 연기 외길을 파고들며 자신을 지켜온 장인정신이 아닐까 싶다. 그 다지고 다져온 에너지가 조금 늦게 터졌을 뿐이다.
 오영수는 요즘 연극 ‘라스트 세션’에 몰두하고 있다. ‘오징어 게임’ 이후 젊은이들과 깐부를 맺은 작품이다. 연극을 보러 대학로에 갔다. 역시 20~30대 관객이 많았다. 반면에 작품은 젊은 취향과 약간 거리가 있었다. 무신론자인 정신분석가 프로이트와 유신론자인 작가 C S 루이스, 그 둘이 신의 존재를 둘러싸고 설전을 펼쳤다.
 연극은 1939년 9월 3일 런던의 프로이트 서재에서 진행된다. 그런데 42세 연상인 프로이트가 루이스를 실제로 만난 적은 없다. 연극적 장치다. 연극의 모태가 된 『루이스 VS 프로이트』를 쓴 아먼드 니콜라이는 “두 사람은 논쟁을 벌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논변을 짝지어 놓는다면 둘이 함께 강단에 서서 논쟁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라고 했다.

 오영수는 83세 프로이트로 나온다. 신의 유무를 놓고 루이스와 타협 없는 평행선을 그린다. 과학과 종교의 충돌 비슷하다. 하지만 인류의 오랜 질문인 신의 문제를 어찌 하루아침에 풀 수 있으랴. 그럼에도 그들을 묶는 대목이 있다. 나치의 상징 히틀러가 공동의 적으로 등장한다. “괴물 히틀러는 ‘신의 뜻’을 주장하면서 유대인을 탄압”(프로이트), “히틀러의 행동은 그 반대되는 가치(도덕률)를 강화”(루이스) 하는 식이다. 히틀러의 독재는 상대방을 차별하며 자기 이익을 얻으려는 권력의 어두운 속성과도 연결된다.

 개인 오영수도 프로이트처럼 신을 믿지 않는다. “내 종교는 연극”이라고 밝혔다. ‘라스트 세션’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사도 프로이트의 “나는 진실을 발견했지! 삶이 끝나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진실!”이다. 기독교인에게 거슬릴 수 있지만 지금 여기에서 최선을 다해, 후회 없이 살라는 현자의 당부 비슷하다. 이 또한 지극히 종교적인 선언이 아닐까. 극장을 나오며 젊은 커플의 촌평을 곁에서 들었다. “유신론과 무신론, 유식한 척하는 서양 할부지들 얘기네.” 불안한 현실에 쪼그라든 청춘이 아니기를 바란다. 그들을 ‘괜찮은 놈’으로 끌어줄 기성세대의 책임을 또다시 생각한다. 허언·식언·과언의 정치권에 대한 기대가 점점 더 멀어져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