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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동의 축적의 시간

좀비기업 선제적 구조조정, 더 미룰 수 없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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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한국 산업생태계의 미래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지난달 도요타 자동차 회장이 야심 차게 전기차 계획을 발표했을 때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과 외신의 전문가들이 놀랐다. 다른 자동차 회사들이 출발한 지가 벌써 몇 년 전인데, 이제서야? 노키아가 스마트폰 트렌드를 놓치고 사라져간 과정의 데자뷔라고 말하는 산업 전문가들도 있었다.

일본의 산업생태계가 혁신이 사라진 죽음의 바다처럼 변해간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정확히는 1990년대 ‘잃어버린 10년(lost decades)’라는 신조어가 탄생할 때부터였다. 어느새 그 햇수도 늘어나서 잃어버린 30년을 넘겼다. 지난해 발표된 세계지식재산기구(WIPO)의 글로벌 혁신지수 평가에서 한국이 5위(아시아 1위)를 기록했을 때 일본은 13위(아시아 4위)에 간신히 턱걸이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일본의 미래가 인공지능에 있다고 그렇게 외쳐도 아직 팩스 종이가 돌아다닐 정도로 기술 패러다임 전환이 더디다. 이처럼 산업생태계가 활력을 잃게 된 배경에는 좀비기업이 있다.

정부 지원에 혁신정신 잃은 일본
우리도 ‘강 건너 불구경’ 아니야
이자 못갚는 기업 40%까지 늘어
기술력 탄탄한 기업은 가려내야

일본 ‘잃어버린 10년’의 후유증

글로벌 자동차업계 1위인 일본 도요타의 도요타 아키오 사장 겸 최고경영자(CEO)가 지난달 14일 미디어 설명회에서 오는 2030년까지 총 30종의 전기차 모델을 도입해 글로벌 시장에서 연간 전기차 350만 대를 판매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AP=연합뉴스]

글로벌 자동차업계 1위인 일본 도요타의 도요타 아키오 사장 겸 최고경영자(CEO)가 지난달 14일 미디어 설명회에서 오는 2030년까지 총 30종의 전기차 모델을 도입해 글로벌 시장에서 연간 전기차 350만 대를 판매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AP=연합뉴스]

일본은 90년대 거품이 꺼지면서 부실기업이 속출했으나 단기적인 충격을 걱정한 정치권과 정부가 공적자금과 금융지원을 쏟아부어 무차별적으로 기업 구제에 나섰다. 경쟁력 없이 정부 지원만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좀비기업들이 속출했지만, 지금까지 20번 이상 이어진 경기부양책은 좀비기업들을 존속시키는 진통제 역할만 했다. 이들은 그 후 새로운 기업과 혁신투자로 가야 할 자금을 한없이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었다. 그때부터 일본의 산업 생태계는 혁신적 도전과 창업의 무풍지대로 조금씩 변해갔다.

혁신이 가득 찬 활발한 산업생태계의 비밀은 알고 보면 너무 간단하다. 경쟁력이 없는 기업이 사라지고, 혁신적인 기술과 비즈니스 모델로 도전하는 새로운 기업들이 기회를 갖는 신진대사가 핵심이다. 이 진입과 퇴출, 즉 창조와 파괴의 메커니즘이 원활하게 작동하지 않으면 인체와 마찬가지로 산업생태계는 성장을 멈춘다.

좀비기업은 경쟁력이 없어 사실상 퇴출당하였어야 할 기업이지만 정부 지원 덕에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기업을 말한다. 좀비기업은 정상기업에서 쓰여야 할 인력과 자본을 붙잡고 있을 뿐 아니라 저품질, 저가수주 등 공정한 시장경쟁 질서를 해쳐 동종업계의 건강한 기업마저 좀비화시키고, 결과적으로 산업 전반의 생산성을 떨어트린다. 나아가 좀비기업으로 나간 부실대출은 금융권의 부실로 번지고, 정상 기업이나 새로 창업하는 혁신기업에 갈 자금을 말린다. 결국 좀비기업은 산업의 혁신기반을 황폐화한다.

코로나19 사태로 상황 더 나빠져

어떤 기업이 좀비기업인지에 대해서 국제적으로 합의된 기준은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좀비기업 대신 한계기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대체로 이자보상배율이 1보다 낮은 상태, 즉 영업이익으로 이자를 감당하지 못하는 상태가 3년 이상 지속하면 한계기업으로 분류한다. 금융권을 포함한 산업정책 담당자들은 이렇게 정의된 한계기업의 수와 비중을 보면서 구조조정이 얼마나 시급한지를 판단한다.

우리나라의 한계기업 실태는 걱정스러운 수준이다. 한국은행 등 관련기관들의 조사에 의하면 조사대상기업의 기준에 따라 수치가 조금씩 다르지만 2020년 기준으로 대체로 15%에서 20% 수준으로 나타나고 있다. OECD 국가중 4번째로 비중이 높다는 결과도 있다. 이 한계기업의 비중은 코로나로 갑자기 늘어난 것이 아니라 지난 10년간 조금씩 증가해왔다는 것이 더 걱정스러운 신호다. 우리 산업 생태계의 신진대사 속도가 지속적으로 떨어지면서 일본화하는 전조증상일 수 있기 때문이다.

2016~20년 한계기업 비중 추이

2016~20년 한계기업 비중 추이

코로나 사태는 이 중장기적인 위기의 덤불에 불쏘시개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 2년간 저금리 기조에 더하여 기업을 대상으로 한 직접적인 정부재정 지원이 크게 늘었다. 그뿐만 아니라 금융지원 차원에서 만기를 연장해주거나 원금 및 이자를 늦게 상환할 수 있도록 유예하는 조치까지 더해지면서, 한계기업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이미 금리는 올라가기 시작했고, 각종 정부지원과 금융지원까지 점차 줄여나가야 할 텐데, 그 결과로 부실기업이 속출하게 될 것이다.

지금부터 선제적이고 과감한 구조조정을 준비하고 실행에 착수하지 않으면 경기가 회복된다고 해도 기업들은 부채를 갚느라 미래를 위한 투자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성장 잠재력의 불꽃은 시나브로 사그라질 것이다. 구조조정은 미룰수록 문제가 더 커지고, 나중에는 일본처럼 정부지원이라는 진통제 처방을 끊을 수 없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구조조정을 할 때 재무제표상 수치에 근거하여 한계기업의 딱지를 붙이고 무차별적으로 퇴출하는 것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막연히  미루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일이다. 성공한 혁신적 기업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예외 없이 한때 좀비처럼 어려웠던 시절이 있다. 세상을 바꾼 기업가 가운데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꽃길이었던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다. 이들이 자신의 기억을 미화하는 게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 혁신적 기술과 제품, 기업이라는 결과는 시행착오를 먹고 자란 과실이기 때문이다. 테슬라·애플·구글뿐 아니라 한국의 반도체와 배터리, 해양플랜트 등 어떤 혁신제품과 기업의 역사를 보아도 모두 좀비의 시기가 있었다.

정부와 금융권의 공동 노력 필요

재무제표상 한계기업으로 분류된 기업에는 상업화 직전 죽음의 계곡에서 고전하고 있는 혁신기업, 창업단계는 성공했으나 다음 단계로 옮겨가지 못해 성장통에 빠진 도약기업, 혁신적 기술이지만 시장의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미래기업들이 섞여 있다. 이들은 미래에 언젠가는 꽃이 피리라는 꿈을 품고 혁신으로 가는 시행착오를 버텨내고 있는 흙 속의 씨앗기업들이다. 고유한 기술이 없고, 근본적으로 경쟁력이 낙후된 좀비기업이 아니다. 한계기업에는 씨앗기업이라는 옥(玉)과 좀비기업이라는 돌(石)이 섞여 있다.

선제적 구조조정 대상은 한계기업 전부가 아니라 이 중에서 구조적으로 경쟁력이 떨어지는 좀비기업이다. 재무제표상 한계기업이지만 미래의 꽃이 될 씨앗기업들을 어떻게 선별해서 지원하고 살릴 것인가가 스마트한 구조조정 전략의 핵심이 돼야 한다. 저마다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구명줄을 기다리는 기업들을 앞에 두고 좀비기업인지 씨앗기업인지를 구분하기란 분명 쉬운 일이 아니다. 산업과 혁신과정에 대한 전문성을 바탕으로 재무제표 이면의 잠재력을 평가할 수 있는 역량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기업의 혁신적 시도를 평가해 본 시행착오 경험도 체계적으로 쌓고 활용해야 한다.

금융권에 만연해 있는 순환보직 시스템으로는 이런 축적된 역량을 갖기가 힘들다. 또한 일회성으로 산업과 기술전문가의 의견을 구하는 임시방편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지금부터라도 금융권 전반이 산업과 기술에 대한 전문적 역량을 가질 수 있도록 획기적이고 조직적인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한계기업의 지원을 담당하는 여러 정부 관련 기관들의 좀비와 씨앗기업 식별역량을 끌어올리는 노력도 미룰 수 없는 사안이다.

실업자보다 일자리가 더 많이 늘어나

무차별적으로 지원하고, 구조조정을 자꾸 뒤로 미루는 데는 금융권의 식별역량이 없는 탓도 있지만, 좀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바로 구조조정으로 파생될 실업문제에 대한 우려다. 그러나 좀비기업의 퇴출로 인해 줄어드는 일자리보다 좀비기업이 존속함으로써 생겨나지 못하는 새로운 일자리가 절대적으로 더 많다. 좀비기업의 수명을 연장하는 데 들어갈 돈으로 구조조정 과정에서 생겨나는 잠재적 실업자와 전직자 등 근로자들을 더 두텁게 지원하는 것이 올바른 전략이다. 좀비기업은 구조조정을 하되 사람을 살려야 한다. 핀란드의 노키아가 망하고 나서 벤처생태계가 오히려 더 활성화된 것도 실업자에 대한 지원과 교육훈련 등 사람에 대한 안전망이 잘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근본적인 문제는 기업 구조조정이 정치인이나 정책담당자 입장에서는 비난받기 좋은 주제이기 때문에 다들 회피하고 싶어한다는 데 있다. 퇴출위기에 놓은 기업과 근로자들은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지만, 아직 태어나지 않은 혁신기업과 새로 생기는 일자리의 근로자들은 목소리 자체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다들 임기 밖으로 폭탄 돌리기를 하거나, 오히려 정부보조나 금융지원을 늘리는 대증적 정책을 중독된 듯 끊임없이 내놓게 된다.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동안 산업생태계 자체를 혁신이 사라진 죽음의 바다로 만든 바로 그 패턴이다.

한국의 산업생태계가 좀비기업들을 과감히 솎아내고 혁신적 씨앗기업들에 기회를 주는 방향으로 갈지, 아니면 일본의 전철을 밟을지는 본격적으로 코로나 출구전략을 고민하게 될 몇 달 내에 결정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