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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리셋 코리아

‘소확행’‘심쿵약속’ 공약에서 빠진 것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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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은재호 리셋 코리아 운영위원·한국행정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은재호 리셋 코리아 운영위원·한국행정연구원 선임연구위원

현재 대선 경쟁에서 도드라지는 풍경 하나는 마이크로타깃팅이다. ‘국민의 삶을 바꾸는 작지만 알찬 공약 시리즈’(이재명 후보의 ‘소확행’)와 ‘내 삶, 내 가족과 이어지는 생활 공약’(윤석열 후보의 ‘심쿵약속’)이 그것이다. 이 후보는 벌써 43개의 ‘소확행’을 쏟아냈고, 윤 후보도 올 초부터 ‘1일 1심쿵’ 기조를 이어가고 있다.

마이크로타깃팅은 유권자 개개인의 욕구와 선호를 추적하며 그들의 생활양식에 조응하는 미세 공약을 제시하는 선거 전략이다. 미국에서 1996년 대선 때 첫선을 보인 클린턴 캠프의 ‘이티비티’ 공약에 이어 오바마 캠프도 이를 활용해 효과를 입증했다. 한국에서는 이·윤 두 후보 진영과 함께 시작하는 셈이다.

소수 이익에 호소해 예산만 늘어
국민 생각하는 중·장기 비전 필요

그러나 둘 다 틀렸다. 클린턴의 ‘이티비티’ 공약은 두 번째 임기를 위한 선거운동에서 진가를 드러냈고, 오바마의 공약은 광범위한 빅데이터 분석을 기반으로 한다. 이·윤 두 후보의 공약은 어떤가. 기본소득을 도입하고 탈모약도 지원하며(이재명), 병사 월급 200만원과 수능 응시료 세액 공제를 약속하지만(윤석열), 미래 전망이나 실행 전략을 말하지 않는다. 두 후보는 별도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성공적으로 초임을 마친 클린턴이 아니다. 이로 인해 국민은 선거를 코앞에 두고도 두 후보의 철학이 무엇인지, 대한민국 미래 비전과 그를 위한 실행 전략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

게다가 캠프로 불리는 소수 전문가 집단의 ‘탁월한’ 아이디어와 ‘예지적’ 통찰력에 의존하느라 비정형 빅데이터 분석같이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조사·연구는 생략됐다. 오바마 캠프의 칼은 사라지고 칼집만 남은 격이다. 그 결과 국민은 국가 공동체의 관점에서 사고하고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내가 속한 집단, 그리고 지역의 편파적 이익에 충실하면 되는 편리함에 익숙해지고 있다.

거대 담론과 유리된 마이크로타깃팅이 한국에서 문제 되는 건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 대신 ‘당신은 무엇을 원하는가’라고 묻는 것은 불가피하게 비용을 수반한다. 모든 요구를 한꺼번에 충족하려면 급속한 예산 팽창이 불가피하다. 어떤 공약을 개발하든 포퓰리즘 논란에서 벗어날 수 없다.

둘째, 세부 집단의 미세 요구를 취합한다고 저절로 공적 의제가 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집단의 요구가 상충하며 갈등이 격화될 뿐이다. 지도자가 필요한 지점은 바로 여기, 종합과 조정을 통해 시대정신을 읽고 미래 좌표를 제시하며 공동체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건데, 종합도 조정도 실종됐다.

셋째, 현재의 유권자는 물론 미래의 유권자조차 주체적 시민으로 세우지 못하고 건강한 공론장의 형성을 방해한다. 서로 다른 생각과 의견, 필요와 요구를 공개적으로 종합하고 조정하는 과정은 ‘반대 의견 접하기’를 촉진함으로써 다양한 주체 사이의 간주관성(intersubjectivity, 집단·개인 간 공유된 이해)을 높여 소통을 쉽게 한다. 거대 담론과 결별한 마이크로타깃팅은 이 과정을 생략하며 파편화된 집단들을 ‘자기 입장’의 거푸집 안에 박제한다.

남은 기간, 선거운동이 소수 전문가와 정치인 카르텔의 선거공학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미세 공약을 아우르는 중·장기 비전 제시가 불가결하다. ‘우리가 원하는 대한민국’의 청사진을 다 함께 그리기에 대선만큼 좋은 기회는 없다.

선거가 끝나면 인수위를 구성하고 국정과제를 선택한다. 국민 ‘전체’가 이 과정에 참여할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그래서 선거운동 기간에 만들어진 공약의 타당성과 우선순위를 캠프가 아니라 국민의 관점에서 검증해야 한다. 그래야만 정치·행정 권력이 엘리트 카르텔에 종속되지 않고 주권재민이라는 민주주의 원리를 구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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