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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침묵』 구하려 청약까지 깼다, 50년 장서가의 진짜 보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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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새 책 『운명, 책을 탐하다』(궁리)를 펴낸 장서가 윤길수씨를 12일 전화 인터뷰로 만났다. 사진은 그가 장서 2만권을 모아둔 자택 서재에서 근대문학 양장본 최초 등록문화재에 지정된 본인 소장 김소월 시집 『진달래꽃』(중앙서림본)을 안고 포즈를 취했다. [사진 윤길수]

지난달 새 책 『운명, 책을 탐하다』(궁리)를 펴낸 장서가 윤길수씨를 12일 전화 인터뷰로 만났다. 사진은 그가 장서 2만권을 모아둔 자택 서재에서 근대문학 양장본 최초 등록문화재에 지정된 본인 소장 김소월 시집 『진달래꽃』(중앙서림본)을 안고 포즈를 취했다. [사진 윤길수]

“귀한 서책을 소장한 자부심은 대통령직하고도 안 바꾸죠.”

한국 최초의 근대화 서적으로 거론되는 개화사상가 유길준의 『서유견문』(1895)부터 2011년 근대문학 첫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김소월 시집 『진달래꽃』(1925)까지. 50년에 걸쳐 한국 근현대 문학 100년사의 유산을 수집한 장서가 윤길수(70)씨가 소장도서 2만여 권에 얽힌 이야기를 책으로 펴냈다.
지난달 출간한 『운명, 책을 탐하다』(궁리)는 11년 전 그가 장서 1만4636권을 한국 근현대 도서 목록집 형태로 정리한 첫 책 『윤길수책』(도서출판b)을 잇는 두 번째 책이다. 그가 2014년부터 6년간 문예지 '문학선'에 연재한 글 중 문외한도 재밌게 읽을 만한 것들을 추려냈다. 충남 논산 산골농가 6남매의 맏이였던 그가 서울 숙부댁에서 외롭게 유학하던 중학교 3학년 시절 헌책방에서 정지용 시를 읽고 벼락 맞듯 빠져든 순간부터 단골로 드나든 전국 고서점 주인들, 책 수집 과정의 뒷이야기가 가득하다. 그가 직접 여러 책을 통해 추적해낸 근대 작가‧예술가의 발자취도 재밌다.

신간 『운명, 책을 탐하다』 펴낸 윤길수씨 #50년간 한국 근현대문학 초판본 수집 #문화재 된 시집 『진달래꽃』 등 2만여권 #"중3 때 정지용 시에 반해 문학 열병… #『님의 침묵』 구하려 주택청약 깼죠”

“『님의 침묵』 구하려 주택청약까지 깼죠”

12일 전화 인터뷰로 만난 그는 “영업직으로 평생 박봉의 월급생활을 하며 수입의 절반 이상을 쏟아부어 책을 모았다. 제가 즐거워서 했다”고 껄껄 웃었다. “50년간 모은 책에 우리 근현대 문학사가 다 있다”면서 “한마디로 양장본의 역사”라 의미를 짚었다.
여기서 양장본(洋裝本)은 개화기부터 나온 서양식 장정 도서로, 한지로 엮은 한적본과 구분해 부르는 말이다. 그는 “장서의 가치는 얼마나 체계적으로 모았느냐가 중요한데 저는 학자들이 개화기 최초 양장 도서로 꼽는『서유견문』으로 시작해, 시‧소설‧한국학 등 분야별 체계를 갖춰 모았다”면서 “개화기부터 1970년 이전까지 나온 양장본 초판본의 약 80%를 소장하고 있다”고 자부했다.

수집한 초판본 중 보물 1·2·3호를 꼽는다면.  

“일제강점기 문학 유물들이다. 문화재에 지정된 민족 시인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말할 필요도 없고 『서유견문』은 근대적 국민 국가를 염원한 유길준의 한글 사랑과 정치 개혁 사상이 담긴 민족 문화 유산이다. 민족의 독립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님의 침묵』(1926)은 길이 보존해야 할 만한 한용운의 역작이다. 또 이광수의 『무정』(1918)은 최초 근대 장편소설로 일제강점기에만 초판부터 8판까지 찍으며 당시 젊은이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모두 문화재로 지정돼도 손색없다.”

『님의 침묵』(1926) [사진 궁리]

『님의 침묵』(1926) [사진 궁리]

귀한 책일수록 수집 과정도 극적이었다. 『진달래꽃』 초판본은 1994년 퇴근 후 노량진 진호서적에서 운명처럼 만났다. 최초 창작 시집으로 알려진 김억의 『해파리의 노래』(1923), 근현대시사에서 『진달래꽃』과 쌍벽을 이루는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1926) 등은 고서점가에 한꺼번에 나온 것을 한번 놓쳤다가 1992년 작고한 어느 대구 장서가의 유품에서 발견했다. 고인의 책 301권을 한꺼번에 인수해야 하는 조건 탓에 주택청약까지 덜컥 해지해 1100만원 목돈을 냈단다. 서울에서 직장생활 하며 반지하 집 전세 살던 시절이었다. 한동안 집사람 눈치를 보며 살았어도 행복했단다. “아내한텐 그저 고맙죠. 아내의 내조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어요.”

이상이 만든 김기림 첫 시집 “지금 봐도 모던”  

이번 책은 쉽게 접할 수 없는 근대문학 유물 내용과 사진도 세세하게 실었다. 책 안팎의 아름다움에 대한 치밀한 묘사가 돋보인다. 작가 이상이 직접 편집‧교정‧장정까지 맡아 펴냈다는, 모더니즘 시인 김기림의 첫 시집 『기상도』(1936)에 대한 대목이 한 예다. “검은 바탕에 두줄의 은회색 선을 내려그은 표지 장정은 지금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모던하다. (중략) 특히 시집을 펼치면 ‘기상도’의 활자가 3페이지에 걸쳐서 점점 커지고 있는데 이는 마치 멀리서 태풍이 몰려오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모더니즘 시인 김기림이 일본 유학 중 간행된 첫 시집 『기상도』(1936, 사진)는 생전 그와 가까웠던 작가 이상이 편집과 교정, 장정까지 맡아 펴냈다. [사진 궁리]

모더니즘 시인 김기림이 일본 유학 중 간행된 첫 시집 『기상도』(1936, 사진)는 생전 그와 가까웠던 작가 이상이 편집과 교정, 장정까지 맡아 펴냈다. [사진 궁리]

한국 최초 가곡 ‘봉선화’ 작곡가 홍난파가 러시아 문호 도스토옙스키의 장편 소설 『가난한 사람들』을 한국인 최초로 번역한 기록도 흥미롭다. 무성영화시대 감독 겸 배우 나운규 등의 영화를 글로 출간한 영화소설들은 당대 인기 스타들의 사진과 함께 대중문화 유행을 보여주는 귀한 자료다.

근대문학 희귀본 수억 원대…국가 제대로 보존해야

한편으로는 폐지로 버려질 뻔한 낡은 책을 고서점 주인들이 살려내고, 장서가들이 간직하며 전해져온 시대의 기록이다. 윤씨는 이런 종이책의 가치를 “내용은 기본이오, 손으로 만져보고, 표지의 아름다움을 즐기고, 종이 냄새를 맡을 수 있는 하나의 공예품”이라 짚었다. 또 “책은 한 나라 역사의 기록”이라 했다. “그 기록을 담은 책을 잘 보존해서 후손에 물려주는 것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책임과 의무”라며 “세계 최초 금속활자를 우리나라가 발명했다고 늘 자랑하는데 정작 최초의 금속활자본 책 『직지심체요절』은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있다. 창피한 일이다. 그만큼 우리 민족이 기록 유산인 책을 제대로 보존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라 지적했다.

장서가 윤길수씨가 한성중학교 시절부터 드나들며 문학과 책에 대해 배운 서울 인사동 고서점 '경문서림' 주인 송해룡 선생이다. “정지용 시집 있어요? 임화의 현해탄 있어요?”하며 들이닥친 까까머리 중학생을, 송 선생은 처음엔 다짜고짜 쫓아냈다. 월북문인 금서를 캐내려고 형사가 보낸 프락치인 줄 알고서다. 오해를 푼 그는 1990년대 초 경문서림이 경영난으로 문을 닫을 때까지 단골로 인연을 이어갔다. [사진 궁리]

장서가 윤길수씨가 한성중학교 시절부터 드나들며 문학과 책에 대해 배운 서울 인사동 고서점 '경문서림' 주인 송해룡 선생이다. “정지용 시집 있어요? 임화의 현해탄 있어요?”하며 들이닥친 까까머리 중학생을, 송 선생은 처음엔 다짜고짜 쫓아냈다. 월북문인 금서를 캐내려고 형사가 보낸 프락치인 줄 알고서다. 오해를 푼 그는 1990년대 초 경문서림이 경영난으로 문을 닫을 때까지 단골로 인연을 이어갔다. [사진 궁리]

근대문학 양장본도 제대로 보존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양장본은 연대로 따지면 100년 남짓밖에 안 되니까 아직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책이 없다. 김소월 시집이 문화재로 지정된 게 획기적인 사건이었다”면서 “양장본이 가치가 없느냐, 하면 천만의 말씀”이라 했다. “『진달래꽃』 『님의 침묵』은 지금 10권이 채 안 남아있다. 그만큼 귀하다. 이런 희소가치 때문에 근래 5~6년 사이 (시장에서는) 굉장히 높게 평가돼 백석의 『사슴』(1936), 미당 서정주의 『화사집』(1941) 같은 시집도 지금 수억 원대를 호가한다”면서다.
원전이 사라져가는 탓일까. 시중에 나온 교재, 연구자료에도 오류가 적지 않다고 그는 지적했다. “『운명, 책을 탐하다』에 실린 시(詩)들은 전부 제가 가진 원전에서 정확히 옮겼다. 학자들한테 공부 좀 하라고 출처까지 써놨다”고 했다. 『진달래꽃』 문화재 지정 당시 총판매소가 각각 다른 중앙서림본(1권)·한성도서본(3권)이 동시에 등록 결정되자, 두 판본이 모두 초판본이 맞는지 끝까지 진위를 따졌던 것도 같은 이유다. 이번 책에도 그는 “부끄럽지 않은 문화재를 후손에게 물려주는 일”이야말로 “김소월 시인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예우”라고 다시 밝혔다.

“다음 책은 월북문인…반쪽 한국문학사 다시 써야”

평생 책이 “종신 학교였다”는 윤씨는 다음 저서도 준비 중이다. '문학선' 연재글 중 월북문인 70여명에 관한 주제만 엮을 예정이다. “월북 문인이 해금(1988년)된 지 30년 가까이 돼가는데 여전히 한국문학사는 반쪽이다. 한국문화사가 다시 쓰이려면 학자들이 원본을 갖고 있어야 한다”면서다. 또 “그동안 단편적으로 관련 책이 몇 권 나왔는데 저자가 뒤바뀌는 등 기록이 정확지 않다. 잘못된 걸 또 인용하는 경우도 있기에 바로잡아가려 한다”고 했다.
이를 “제 나름대로 사회 환원”이라 고백했다. “장서를 갖고 있다 보니 편하게 산다든가 하는 목적은 없었어요. 아들‧며느리한테 물려주기로 하면서 그런 얘긴 했죠. ‘아버지가 평생 남의 도움 안 받고 자력으로 번듯하게 박물관이나 문학관을 지어 사회에 기부하려 했는데 그걸 못했다. 너희가 금전적으로 잘 된다든지 하면 아버지가 못다 한 걸 해볼 수 있는 것 아니냐’고요. 지금은 이 자료로 이렇게 글 쓰는 것만으로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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