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시경뒤 시력 잃고 소송도 패소…2000만원 계산서 날아왔다

중앙일보

입력 2022.01.1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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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남성 권모씨는 2014년 객혈 증상으로 경기도 성남의 한 병원을 찾았다. 병원에서 기관지 내시경 검사를 받았고, 검사 도중 기관지 위쪽에서 피가 나 급히 지혈하는 일이 있었다. 검사가 끝난 뒤 권씨는 갑작스러운 두통을 호소했고 심박수가 비정상적으로 빨리 뛰는 등의 증상을 보여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곧이어 뇌경색이 왔고, 양 눈의 시야가 영구적으로 일부 보이지 않는 후유증도 생겼다.

권씨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물건을 찾는 일, 운전 등 이전에는 당연했던 일상이 버거워졌다. 다니던 회사에서도 기피 부서로 옮겨졌고, 컴퓨터를 많이 보는 업무에 집중하기도 어려웠다. 결국 권씨는 병원을 상대로 1심 5억원(2심 2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기관지 내시경 검사 당시 지혈에 쓴 약물, 혈압 조절에 쓴 약물 등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병원의 과실이 있다고 주장했다.

법원 이미지.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법원 이미지.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법원은 하지만 당시 병원의 처치로 인해 후유증이 생긴 게 아니라고 봤다. 권씨가 과거 앓았던 폐결핵으로 인해 심장의 기형이 생겼고, 이 때문에 후유증이 생겼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한 것이다.

의료소송 지자 소송비 청구서…"피해자 벌주는 격" 

1·2·3심 모두 패소한 권씨에게 이후 법원으로부터 2000만원의 소송 비용 계산서가 날아왔다. 민사소송법 98조 ‘소송비용은 패소한 당사자가 부담한다’는 패소자 부담 원칙에 따라 소송에 지면 상대방의 재판, 변호사 비용까지 부담해야 하기 때문이다. 권씨는 병원이 요구한 2000만원과 자신이 쓴 소송 비용을 합쳐 수천만 원의 부담을 지게 됐다.

권씨는 의료소송 자체가 비전문가인 피해자들이 전문가인 병원의 책임을 구체적으로 입증해야 하는 ‘기울어진 운동장’임에도 패소하면 상대방의 소송 비용까지 부담시키는 건 지나치다고 주장했다.

패소 가능성이 높은 힘든 소송인 데다, 패소하면 상대방 소송 비용까지 물어야 한다는 부담까지 있어 피해자들이 의료과실 소송 자체를 꺼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박호균 변호사(법무법인 히포크라테스)는 "어려운 소송에 용기 낸 사람들에게 소송 비용까지 물려 벌을 주는 건 불합리하다"며 "패소자 부담주의로 인해 헌법상 재판청구권이 제약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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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소송에 예외를" vs. 법무부·법원행정처 "남소 우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의료과실 소송이나 정보공개청구소송 등 공익소송에 대해서는 '패소자 부담 주의'를 적용하지 말자는 목소리가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불특정 다수의 피해를 구제하거나,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목적의 소송, 원고의 증명 부담이 큰 소송만큼은 당사자가 맘 놓고 재판을 청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취지다. 그 예로 스크린도어 관리 소홀로 낙상 위험에 처한 시각장애인들의 소송, 버스 승차 거부와 관련한 장애인들의 소송, 환경 피해로 인한 주민들의 집단 소송 등이 거론된다.

12일 박주민 의원실과 대한변호사협회 등이 주관한 토론회에 모인 법조계 전문가들도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점에는 입을 모았다. ▶개별 재판부가 사안에 따라 소송 비용을 감면할지를 정하는 방안 ▶일정 부분 공익성 요건이 충족되면 무조건 감면시키는 방안 등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다만 공익소송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볼 것인지, 어떤 절차를 거쳐 감면시킬지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필요한 상태다. 또 판단이 애매한 '회색 지대'에 있는 사건들을 그때그때 어떻게 볼 것이냐는 문제가 남아있다.

김창형 법무부 국가소송과 행정사무관과 이승은 법원행정처 사법지원실 사무관은 "소송 비용 부담이 적어질 경우, 재판을 과도하게 청구하는 '남소'가 만연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반면 박 변호사는 "패소자가 소송 비용을 부담하도록 한 뒤에 소송 수가 줄어들었느냐"고 반문했다. 또 “비용을 패소자에게 받아낼 수 있다는 생각에, 화해나 조정률이 오히려 떨어진다”라고도 지적했다. 이종구 단국대학교 법학과 교수도 "공익 소송은 국가가 해야 할 일을 국민이 대신해서 소송하는 것"이라며 일반 소송과는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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