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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잃은 아이, 슬픔·불안 누르지 말고 표현하게 해줘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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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1호 27면

[천근아의 세상 속 아이들] 어린 시절 상실의 아픔

어린 시절 상실의 아픔

어린 시절 상실의 아픔

# 얼마 전 고등학교 후배로부터 갑작스러운 전화를 받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30여 년 만의 연락이었다. 후배는 올해 갓 스무 살이 된 조카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6년 전 언니와 형부가 갑자기 교통사고로 사망하게 되어 언니 부부의 하나밖에 없는 딸을 그간 돌봐 왔는데, 그 조카가 최근 자살 시도를 했다는 것이다. 조카는 부모 사망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고 한다.

“지난 6년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는 물었다.

“상황이 많이 복잡해요. 언니와 형부 사망 당시 양가 조부모님들 모두 건강이 안 좋으시고 여건이 안 돼서 고모와 이모가 번갈아가며 조카를 돌봤어요. 조카가 고모 아이들과 문제가 생기면서 중학교 졸업 후부터는 제가 정식 후견인이 되어 돌보기 시작했고요.” 후배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그런데 아이가 몇 개월 전부터 방을 얻어 독립하겠다고 하도 졸라서 원룸 하나를 얻어주었는데, 그곳에서 문제가 생겼지 뭐예요.”

“그나저나 아이는 괜찮은 거야? 응급실은 갔고?” 나는 일단 아이의 건강 상태를 물었다.

“예. 약국에서 사다 모은 수면 유도제 수십 알을 먹었는데 다행히 응급실에서 위세척하고 안정이 됐어요. 응급실에서 정신건강의학과 보호 병동을 강력히 권했는데 아이가 그냥 외래로 다니겠다며 입원을 완강히 거부해서 할 수 없이 귀가했어요.”

“다행히 아이가 정신과 치료를 받겠다고는 하나 보구나.”

“네. 이제야 조카가 털어놓는데 부모님 돌아가신 이후 무기력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고 가슴이 항상 답답했대요. 불면증도 오래된 것 같고요. 제가 너무 무심했었나 봐요.” 전화기 너머 후배의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전해졌다.

# 진우는 내년에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유치원생이다. 몇 달 전 혈액암으로 투병하던 아버지가 끝내 돌아가셨다. 진우 엄마의 걱정은 아이가 아버지 사망 후 유치원 선생님이나 낯선 손님들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 아빠 죽었어요’라고 말하고 역할 놀이에서 누군가 죽는 장면을 반복적으로 보인다는 것이었다. “선생님! 제가 아이 앞에서 울지 않으려 노력하고 밝은 모습만 보여줘서 아이가 저렇게 죽음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표현하는 건가요? 너무 당황스럽습니다. 아이가 놀이 치료라도 받아야 하나 싶어 찾았습니다.”

진우 엄마는 남편을 잃은 슬픔을 꾹꾹 참아가며 말을 이어갔다. “진우 누나는 초등학교 4학년이어서 어느 정도 의젓하게 대처하는 것 같은데 진우가 걱정입니다.” 진우 엄마는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

“그런데, 진우 어머님과 진우 누나는 아버님 돌아가신 후 애도 과정을 충분히 가지셨나요?” 나의 질문에 진우 엄마는 애써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그리고 한참을 울다가 겨우 입을 떼셨다. “저는 아이들 잘 때까지 기다리다가 몰래 방에서 울고, 세면대 물소리 크게 틀어놓고 울고, 아이들 앞에서는 슬픈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애썼어요. 아이들이 힘들어할까 봐요. 큰애가 제 눈치를 많이 보고 동생도 잘 돌봐줬어요. 그러고 보니 큰애가 너무 어른스럽게 행동했던 게 마음에 걸리네요.” 진우 엄마는 정작 본인이 남편 사별 후 제대로 애도 기간을 갖지 못했다고 고백하며 이제라도 온 가족이 제대로 상담을 받고 싶다고 말했다.

수년간 간헐적으로 슬픈 감정 보여

어린 시절 부모를 잃은 후 상실에 대한 아이의 반응은 성인기의 상실에 대한 반응과는 사뭇 다르다. 예를 들어, 여동생을 사고로 잃은 어린아이가 조문하러 온 방문객에게 “제 여동생이 죽었어요”라고 무심히 말하기도 한다. 마치 아이가 철없고 감정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이 입장에서는 자신이 이것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고 느껴야 하는지 가늠하고 파악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고 도움을 구하는 방식이다. 아이들은 부모를 잃은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한 방식으로 죽음이나 장례 의식을 재연하는 놀이를 하고, 남은 부모에게 죽음에 대한 질문을 반복해서 한다. 이는 죽음이라는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변 상황이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위안과 확신을 얻으려는 시도이다.

두 번째 사례의 진우와 같은 5~6세 된 아이가 아빠가 사망한 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놀이하는 광경 또한 비슷한 맥락이다. 즉, 발달학적 시기에 따라 아이들은 상실을 받아들이는 인지와 정서적 역량이 다르다. 부모를 잃은 후 무심하고 태연해 보이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아이가 너무 어려서 큰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어린아이들은 부모를 잃은 상실감이 너무 두렵기 때문에 그 강한 감정을 오래 견디지 못하고 압도되지 않기 위해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돌봄을 받고자 하는 의존 욕구가 큰 어린아이일수록 슬픔에 대한 반응을 보이는 대신 자신을 보살펴줄 다른 대체자를 즉각 찾는 경향이 있다.

아이들은 부모를 잃은 후 수년에 걸쳐 오랜 기간 간헐적으로 슬픈 감정과 행동을 보인다고 한다. 즉, 성장해 가면서 상실에 대한 반응이 다양한 형태로 반복되고 재연되는 것이다. 따라서 상실을 경험한 아이를 대할 때 발달학적 특성을 인식하고 부모를 잃은 후 슬픈 감정을 충분히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이해해야 한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는 것이 성장하는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은 부모를 잃기 전 부모-자녀 관계가 어떠했느냐와 부모를 잃은 후 아이가 받는 안정적인 지원 정도에 달려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애착 형성이 충분히 이루어져야 할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는 것이 가장 힘들 것으로 예상한다. 그러나 아이가 부모를 잃은 후에도 도움이 되는 강력한 지원 시스템이 있다면 여전히 안정적인 애착을 형성하며 잘 성장할 수 있다.

반면에 청소년기나 성인기 초반에 부모의 상실을 경험했다 하더라도 주변의 지지 체계가 부실하다면 큰 고통을 겪고 무기력해질 수 있다. 따라서 부모를 잃은 시기가 고통 정도를 결정할 수는 없다. 첫 번째 소개한 후배의 조카 사례는 불의의 사고로 부모를 한꺼번에 잃은 후 고모와 이모 집에 번갈아 다니며 제대로 안정적인 돌봄을 받지 못했다. 10대 이후 부모의 상실을 겪었으나 주변 지지 체계가 확립되지 못하고 심리적,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생활을 하면서 무기력감을 겪다가 결국 극단적인 상황까지 간 것이다.

아이는 부모를 잃은 후 끝없이 무섭고 자신의 미래에 대해 불확실하다고 느낀다. 이는 남은 한쪽 부모에게 큰 부담을 주어 어린 자녀에게 상실에 따른 고통을 드러내지 않고 스스로 감당하게 만든다. 그러나 남은 한쪽 부모가 슬픈 감정을 부정하고 억압하는 태도가 부모와 자녀의 애도 및 치유 과정을 방해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아이 앞에서 배우자를 잃은 슬픔을 피하고 애써 정상적인 행동을 하려는 이유는 아이가 부모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슬픔을 다룰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이 잘못이 아니란 걸 알게 해줘야

부모가 슬픈 감정을 잘 표현하고 잘 다루는 모습을 보여줘야 아이도 상실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할 수 있다. 돌아가신 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자유롭고 편안하게 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 아이가 정상적인 애도 과정을 거쳐야 미래에 대한 불안이 줄어든다. 부모의 죽음이 자기에게 책임이 있다고 느끼는 아이에게는 그것이 결코 아이의 잘못이 아님을 알게 해줘야 한다. 돌아가신 부모를 ‘잊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줘야 한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죄책감과 무력감을 경험하는 경우가 많다. 슬픔에 빠진 한쪽 부모의 모습을 보며 자녀가 막연한 책임을 느끼게 되고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에 무력감을 느낀다. 이때, 남은 부모는 아이가 해결할 수 있는 일과 어른이 해결할 일이 무엇인지를 잘 구분해 줘야 한다. 즉, 부모가 배우자를 잃은 자신의 슬픔은 전문가와 상담을 통해 스스로 잘 관리해나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좋다. 그래야 아이는 비로소 안심하고 자신이 할 본연의 일에 집중하며 무력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부모를 잃기엔 최악의 나이(the worst age to lose a parent)’란 사실 없다. 상실 전후의 안정적이고 지지적인 관계가 더 중요하다.

※개인 정보 보호를 위해 등장인물을 가명으로 처리했고, 전체 흐름을 왜곡하지 않는 범위에서 일부 내용을 각색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천근아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소아정신과 교수. 연세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석·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세브란스병원 소아정신과장으로 재직 중이다. 2008년 영국 국제인명센터(IBC)의 ‘세계 100대 의학자’로 선정. 서울시교육청 자문위원, 가정법률상담소 교육위원, 법무부 여성아동정책심의위원으로 활동했다. 저서로는 『아이는 언제나 옳다』, 『엄마 나는 똑똑해지고 있어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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