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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영의 영감의 원천] 근원적 고독 건드린 화폭, 막장 드라마에 기품 불어넣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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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1호 26면

함메르쇼이의 부활

〈사진 1〉 빌헬름 함메르쇼이 ‘젊은 여인의 뒷모습과 실내’(1904). [사진 덴마크 란데르스 미술관]

〈사진 1〉 빌헬름 함메르쇼이 ‘젊은 여인의 뒷모습과 실내’(1904). [사진 덴마크 란데르스 미술관]

영국 영화 ‘레이디 맥베스’(2016)는 줄거리만 보면 단연 막장드라마라 할 만하다. 불륜에 얽힌 연쇄살인 이야기니까 말이다.

주인공 캐서린(플로렌스 퓨)은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영국 촌구석의 지주 집안에 팔려오다시피 시집온 어린 신부다. 집안의 전권은 독재적인 시아버지가 쥐고 있고 남편은 아버지에 찍 소리도 못하면서 캐서린을 구박하거나 방치한다. 이 집에선 모든 행동에 제약을 받고 외출의 자유조차 없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과 시아버지가 각각 다른 볼 일로 멀리 여행을 떠나고 캐서린은 모처럼 자유를 만끽하다가 하인과 눈이 맞는다. 집에 돌아온 시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고 하인을 혹독하게 체벌하고 감금하자 캐서린은 시아버지를 독살한다. 그리고 드러내놓고 하인과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다가 남편이 돌아와 추궁하자 하인과 공모해 남편도 살해한다. 하지만 이번엔 남편의 사생아 소년이 집으로 찾아오고 연인인 하인과의 관계도 삐걱거린다.

북서울미술관서 그림 ‘실내’ 전시

〈사진 2〉 영화 ‘레이디 맥베스’(2016)의 장면. [사진 영화 스크린 캡처]

〈사진 2〉 영화 ‘레이디 맥베스’(2016)의 장면. [사진 영화 스크린 캡처]

이렇게 막장스러운 줄거리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여러 독립영화제에 초청되며 호평을 받은 것은 사실주의 문학의 걸작 『마담 보바리』를 닮은 냉연한 묘사 때문이다. 곤충을 밟는 어린아이의 순진한 잔인함을 연상시키는 캐서린의 욕망 추구는 처음엔 그럭저럭 저항의 모습을 띠다가 점점 폭주하면서 괴물이 되어간다. 이 과정이 어떤 미화도, 신파적인 변명 없이, 반대로 비난도 없이, 건조하고 속도감 있게 묘사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삼류 막장드라마로 흐르지 않는다. 여기에는 영화 ‘미드소마’ ‘작은 아씨들’에서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주며 요즘 대세로 떠오른 배우 플로렌스 퓨의 연기가 한 몫 했고, 또한 영화의 미술이 한 몫 했다. 등장인물들의 야만적 욕망이 폭발하는 곳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극도로 색채와 장식과 가구가 절제되고 깔끔한, 그리고 안개에 걸러진 햇빛이 고요함과 호젓함을 북돋우는 집안 공간이다.

이 단아하고 적막한 미니멀리즘 인테리어에서는 불륜 정사도 살인도 절제된 톤으로 비교적 조용히, 그래서 더 냉혹하게, 펼쳐진다. 『마담 보바리』의 엠마가 대책 없이 낭만적인 성격으로 스스로를 파괴했다면, 제목처럼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부인을 닮아 야성적이고 저돌적인 캐서린은 주변을 모두 파괴한다. 모든 파괴의 폭풍이 지나간 후에 휑한 집안에서 관객을 향해 등을 돌리고 홀로 서있는 캐서린의 모습(사진2)은 덴마크 화가 빌헬름 함메르쇼이(1864~1916)의 그림을 그대로 빼 닮았다. 마침 한국에서도 함메르쇼이의 작품 한 점을 볼 수 있다. 지금 북서울미술관에서 5월 8일까지 진행 중인 ‘빛: 영국 테이트 미술관 특별전’에 나온 그림 ‘실내’다. (사진4)

〈사진 3〉 영화 ‘레이디 맥베스’(2016)의 장면. [사진 영화 스크린 캡처]

〈사진 3〉 영화 ‘레이디 맥베스’(2016)의 장면. [사진 영화 스크린 캡처]

실제로 감독 윌리엄 올드로이드는 영화의 간소한 인테리어와 섬세한 빛의 묘사가 함메르쇼이의 그림을 참고로 한 것이라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영화의 배경인)영국 북동부의 햇빛은 스칸디나비아를 떠올리게 합니다. 덴마크 미술가 빌헬름 함메르쇼이는 아주 흥미로운 실내 그림들을 많이 남겼는데, 그 그림들에선 여성이 창 밖을 내다보는 등 관람객에 등을 돌리고 있죠. 그 얼굴 없는 여인들을 보며 나는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캐서린일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함메르쇼이의 기존 팬들은 이 영화가 짓궂은 오마주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실내 그림에 나오는 뒷모습의 여인은 언제나 내면에 고요히 침잠해 있는 모습이다.(사진1) 그 모델은 화가의 아내 이다(Ida)였고 그 배경은 그들 부부가 살았던 덴마크 코펜하겐의 아파트였다. 그런데 그 여인과 실내가 욕망의 화신 캐서린과 그가 저지르는 범죄와 파멸의 장소로 재탄생한 것이다.

그만큼 함메르쇼이의 실내 그림이 폭넓게 재해석될 수 있는 상징주의적 회화라는 이야기도 된다. 함메르쇼이의 실내 그림들이 주는 느낌은 보는 사람에 따라, 그리고 같은 사람이라도 그날의 기분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어떤 때는 평화로운 고요가, 어떤 때는 감미로운 우수와 노스탤지어가, 어떤 때는 스산한 고독감과 단절의 느낌이 밀려온다.

작가인 함메르쇼이가 그런 느낌들 중 무엇을 주로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그의 그림과 꼭 닮은 과묵하고 내성적인 사람으로서, 좁은 범위의 사람들과만 교류하며 대중 앞에서 자신의 작품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기 때문이다.

〈사진 4〉 빌헬름 함메 르쇼이 ‘실내’(1899). [사진 영국 테이트 미술관]

〈사진 4〉 빌헬름 함메 르쇼이 ‘실내’(1899). [사진 영국 테이트 미술관]

그림들에 드러나는 그의 아파트 실내 장식만 보아도 그의 성품이 드러난다. 그는 부유한 중상층(upper middle class)이었지만, 당시 유행한 이국적이고 화려한 인테리어와 전혀 다른 간소하고 단아한 인테리어로 자신의 집을 꾸몄다. 흰색과 청회색과 나무색이 주조를 이루는 실내. 불필요한 가구가 전혀 없이 여백을 살린 공간에 놓인 몇 점의 묵직한 가구. 장식품이 거의 없는 가운데 액센트를 주는 몇 점의 청화백자와 몇 점의 에칭 판화. 이것이야말로 현대인이 열광하는 북유럽풍 미니멀리즘 인테리어가 아닌가.

함메르쇼이가 21세기에 ‘부활’한 것은 이러한 미니멀리즘 인테리어와 라이프 스타일이 각광 받기 때문도 있을 것이다. 함메르쇼이는 생전에 충분히 이름 있는 화가였지만, 사후에 다른 많은 상징주의 미술가들과 함께 잊혀져 갔다. 20세기 초 전위예술이 득세하고, 19세기 말 미술로는 전위예술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친 후기인상주의 미술만 중시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상징주의 미술에 대한 관심이 다시 커지면서 함메르쇼이도 점차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특히 90년대 말부터 시작되어 파리·런던·뉴욕·도쿄로 이어진 그의 회고전들이 그를 다시 유명하게 만들었다. 한국에서도 2000년대 들어 함메르쇼이는 조금씩 인기를 얻으며 문학책 표지에 많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것이 북유럽 디자인이 인기를 얻기 시작한 시점과 겹친다는 것이다.

함메르쇼이의 친구이자 미술사학자였던 에밀 하노버는 그의 그림이 “우리 시대(19세기 말~20세기 초)의 모든 요란한 몰취미에 대한 고요한 저항”이라고 말했다. 100년 전 덴마크보다 더욱 요란한 이미지가 홍수를 이루고 일회성 물품과 그 소비로 숨이 막힐 지경인 현대에, 그리고 그에 대항해서 적게 사고 적게 쓰고 적게 두고 비워내는 미니멀리즘 라이프스타일 운동이 벌어지는 지금 함메르쇼이의 그림이 인기를 누리는 것은 놀랍지 않다.

“요란한 몰취미에 대한 고요한 저항”

하지만 함메르쇼이의 인기는 단지 그 간소하고 단아한 북유럽 실내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그림들은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을 건드린다. 그런 점에서 함메르쇼이의 열렬한 팬인 영국의 배우 겸 저자 마이클 팰린을 비롯해 많은 이들은 함메르쇼이를 한 세대 후의 미국 화가 에드워드 호퍼와 비교하곤 한다. 호퍼의 그림들 역시 햇빛의 쓸쓸함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호퍼의 경우에도 건축물의 외관과 인테리어에서 디테일이 생략되어 더 커다랗고 휑한 느낌을 주고, 사람은 아예 없거나 드문드문 나타날 뿐이며, 햇빛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처럼 공기를 채우고 어른거리는 대신 건물 벽면이나 바닥에 단단한 빛의 사각형을 만든다. 그래서 텅 빈 공간과 정적이 강조된다.

그러나 둘에는 차이가 있다. 호퍼의 그림 속 배경은 호텔, 역과 기차 안 객실, 카페 등인 경우가 많다. 멈추어 상념에 젖을 수 있는 공간이면서도 안착과 안식보다 다시 떠나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여행이 계속될 것임을 암시하는 공간이다. 이런 공간은 그림에 근원적인 고독감을 더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그림의 색채도 채도가 높아서 이 활기를 돕는다. 반면에 낮은 채도의 색채가 주조를 이루는 함메르쇼이의 집안 그림은 한없이 고요하게 가라앉는다. 코로나 시대에 호퍼의 그림이 많이 소환되고 있지만, 집에 갇혀있는 사람들에게 더욱 어울리는 것은 함메르쇼이의 그림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호퍼의 그림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상상하기 쉽지만 함메르쇼이의 그림은 그저 모호하고 복합적인 정서의 미스터리다. 호퍼는 한 편의 단편소설이고 함메르쇼이는 한 편의 시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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