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부인 김건희씨의 ‘7시간 통화 녹음’이 대선 정국의 핵심 이슈로 떠올랐다. 14일 오후 법원이 김씨 통화 녹음 내용을 다루겠다는 ‘MBC 스트레이트’ 프로그램에 ‘조건부 방송 허가’를 결정하면서다.
서울서부지법 민사합의21부(박병태 수석부장판사)는 이날 김씨가 MBC를 상대로 낸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을 일부 인용하면서, 7시간 45분 분량의 통화녹음 파일 중 김씨 관련 수사가 진행 중인 사안, 김씨의 정치적 견해와 무관한 일상 대화 등을 제외한 부분은 방송을 허용했다.
이를 접한 국민의힘은 강력한 유감을 표명했다. 이양수 선거대책본부 수석대변인은 성명서를 내고 “불법 녹취 파일을 일부라도 방송을 허용하는 결정이 나온 것은 대단히 유감스럽다”고 했다. “특히 선거를 앞두고 공영방송이 취재윤리를 위반하고 불순한 정치공작의 의도를 가진 불법 녹취 파일을 방송한다는 것은 정치적 중립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으로, 언론의 기본을 망각한 선거 개입의 나쁜 선례가 될 것”이라며 “향후 방송 내용에 따라 법적 조치를 포함하여 강력히 대처해 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이 대변인은 추가 입장문을 통해 재판과정에서 구체적인 김씨의 발언들의 방송 여부가 어떤 식으로 정리됐는지를 설명했다. 그는 “김씨는 수 개월 전 발언을 구체적으로 기억할 수 없어 MBC 측이 (방송 준비 차원에서)반론을 요청한 3개 발언. 쪽글(지라시 형태)로 도는 6개 발언에 대해 방송 금지 가처분 신청을 했는데, 법원이 이 중 2개 발언은 방송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5개 발언은 MBC 측에서 ‘방송내용에 없다’고 했다”고 설명했다. 결과적으로 김 씨가 방송 금지 신청을 한 9개 발언 중에선 2개만 방송을 타게 된 셈이다.
하지만 여기엔 기본적인 맹점이 있다. 가처분 신청 재판 과정에선 9개 발언만 논의가 됐지만, 실제로 MBC가 확보해 방송을 준비하고 있는 발언은 이 9개 보다 훨씬 많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김 씨의 발언 들 중 법원이 명시적으로 방송을 금지한 '수사가 진행 중인 사안', '김씨의 정치적 견해와 무관한 일상 대화'외엔 기본적으로 방송이 허용된다. 국민의힘 선대본부 관계자도 본지 통화에서 “실제 MBC 측이 어느 정도 수위의 김씨 통화 내용을 가지고 있고, 또 방송에 내보낼지는 전혀 알 수 없다”고 했다.
이를 반영하듯 당 내부에선 당혹스러워하는 기류가 곳곳에서 감지됐다. 익명을 원한 국민의힘 관계자는 “가처분 신청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으로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막상 닥치니 어디서부터 어떤 식으로 대응해야 할지 막막하다”고 토로했다. 당 선거대책본부 인사들 사이에선 “대선이 두 달도 안 남았는데 폭탄이 터졌다”라거나 “지지율이 출렁이는 소리가 벌써 들리는 것 같다”는 우려가 계속 흘러나왔다.
이날 공개된 법원 결정문에는 방송할 수 있는 내용으로 ‘윤석열 후보의 정치 행보에 대하여 채권자(김씨)가 조력자 역할을 한 내용’, ‘여러 정치 현안과 사회적 이슈에 대해 밝힌 견해’ 등을 거론한 문구가 등장한다. 민감한 내용이 포함됐을 가능성이 작지 않다는 뜻이다. 이에, 당 일각에선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 등의 강력한 대응이 오히려 일을 키웠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와관련, 홍준표 의원은 법원 결정 전 “그냥 해프닝으로 무시하고 흘려 버렸어야 했을 돌발 사건을 가처분 신청해 국민적 관심사로 만들었다”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리기도 했다.
이날 지방유세 일정으로 창원을 방문한 윤 후보는 기자들의 관련 질문에 “지금 할 얘기가 없다”고 말을 아끼는 모습이었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은 “국민 상식에 부합하는 결정”이라는 입장을 냈다. 조승래 민주당 수석대변인은 서면 브리핑을 통해 “김씨의 방송 금지 청구를 사실상 기각한 것”이라며 “법원은 김씨의 수사기관에서의 방어권을 인정하면서도 김씨의 발언을 방송하는 것이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고 말했다. 이어 “방송을 막기 위해 MBC에 몰려간 국민의힘 의원들의 행위가 잘못된 것임이 증명됐다"며 “국민의힘은 MBC의 방송편성권을 침해하려 한 언론탄압에 대해서 분명하게 사과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날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가 서울 마포구 MBC 본사에서 규탄 집회를 연 것을 지적한 것이다. 조 수석대변인은 윤 후보 부부를 향해선 “공개되는 김씨의 발언 내용에 대한 국민적 판단 앞에 겸허하게 임하기 바란다. 그것이 유권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꼬집었다.
민주당 내부적으로는 여론 동향을 예의주시해야 한다는 기류도 감지됐다. 방송이 강행된 이후 자칫 사생활 침해나 여성 인격 비하 논란으로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우려였다. 익명을 원한 민주당 선대위 관계자는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김씨의 발언이 방송된다고 해도 전체 표심에 큰 영향을 준다고는 보기 힘들다”며 “오히려 경거망동하지 않고, 그간 해오던 대로 민생과 경제에 집중하며 실용 행보를 계속해 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민주당의 초선 의원은 “김건희 리스크가 이미 지지율에 반영돼 있어 방송이 된다고 해도 표심에 미칠 영향이 그렇게 크진 않을 것 같다”며 “‘윤석열은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해 온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더 굳혀 지지율 추가 반등을 막는 수준일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