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보니 양반 출신···정조 두번 찬 성덕임, 왜 승은 거부했을까 [역발상]

중앙일보

입력 2022.01.14 11:30

업데이트 2022.01.14 23:08

MBC 사극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정조(이준호)와 성덕임(이세영) [사진 MBC]

MBC 사극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정조(이준호)와 성덕임(이세영) [사진 MBC]

정조와 궁녀 성덕임의 로맨스를 다룬 MBC 사극 ‘옷소매 붉은 끝동’이 최근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정조는 일생 동안 한 명의 왕비와 네 명의 후궁을 두었는데, 이중 성덕임은 정조의 '유일한 사랑'이라고 여겨지는 여성입니다. 둘의 관계는 비록 숙종과 희빈 장씨만큼 유명하진 않지만, 조선 역사에서 흔치 않은 러브스토리를 남긴 것은 분명합니다.

정조를 두 번이나 찬 여성
성덕임은 정조의 구애를 두 번이나 거절한 일화로 유명합니다.
정조는 왕세손 시절이던 1766년(영조 42) 승은(국왕 또는 세자와의 잠자리)을 시도했으나, 성덕임은 “세손빈(정조의 정식부인·후일 효의왕후)이 아직 아이를 낳고 기르지 못하여 감히 승은을 받을 수 없습니다”라며 거절했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1780년(정조 4년). 정조는 무려 14년 만에 다시 뜻을 전했는데, 성덕임이 재차 거부합니다. 결국 정조는 성덕임의 하인을 처벌하는 압박을 통해 뜻을 이룹니다.

 MBC 사극 ‘옷소매 붉은 끝동’의 한 장면 [사진 MBC]

MBC 사극 ‘옷소매 붉은 끝동’의 한 장면 [사진 MBC]

그런데 눈에 띄는 것은 이때 두 사람의 나이입니다. 정조는 29세, 성덕임은 28세입니다. 지금과는 달리 당시 28세 여성은 '노처녀'라고 부르기도 어색할 만큼 결혼에 늦은 나이에 속했습니다. 그만큼 정조는 그녀를 잊지 못한 채 마음속 깊이 품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정조의 애정은 결실을 보았습니다. 정조는 홍국영의 누이동생 원빈 홍씨를 첫 번째 후궁으로 들였으나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 채 사망했고, 효의왕후와의 사이에서도 아이가 없어 후손이 귀하던 상황.
성덕임은 왕실의 기대에 부응하며 아들(문효세자)을 낳았고, 정1품인 빈(嬪)에 오르게 됩니다. 이어 2년 뒤엔 딸을 낳아 기쁨을 더해줬습니다.

그러나 행복한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는데, 문효세자는 다섯 살때 홍역으로 사망했고, 불과 넉달 뒤에 의빈 성씨마저 임신한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의빈 성씨가 갑작스레 사망하자 정조는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제부터 국사를 의탁할 데가 더욱 없게 되었다"며 한탄했다고 하니 그녀에 대한 신임이 상당한 수준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MBC 사극 ‘옷소매 붉은 끝동’의 한 장면 [사진 MBC]

MBC 사극 ‘옷소매 붉은 끝동’의 한 장면 [사진 MBC]

참고로 문효세자의 사망 후 처방에 대한 논란이 한 달여 간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사간원과 사헌부에서는 "홍진(홍역)은 매우 심한 열의 증세인데 삼과 부자 같은 극온(極溫)의 약제를 사용하였으니, 고금에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정조실록』 10년 5월 16일)라며 의관을 탄핵하라고 요청했는데, 정조는 "증세에 따라 약을 쓰고 내 몸소 살피었다"며 거절합니다.
정조는 의학에 조예가 깊어 직접 의학서적(『수민묘전』)을 출판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훗날 중태에 빠진 정조도 '나는 몸에 화기가 많아 좋지 않다'며 거절하던 인삼을 먹은 뒤 급사했으니 부자 간의 가혹한 우연의 일치랄까요.

인삼 [사진 금산군청]

인삼 [사진 금산군청]

성덕임은 누구?
조선 시대 후궁은 정식 절차를 통해 들어온 '간택 후궁'과 궁녀나 외부인(기생, 여종 등)이 승은을 입고 후궁이 된 '비간택 후궁'으로 나뉩니다. 홍국영의 여동생 원빈 홍씨는 간택 후궁, 성덕임의 경우는 비간택 후궁인 셈입니다.

당대 세도가 홍국영의 여동생에서 알 수 있듯이 간택 후궁은 사회적 지위가 높았습니다.
왕비나 세자빈을 뽑을 때처럼 선발기구를 설치해 금혼령을 내려서 정식으로 선발했고, 유력 가문에서 나오기도 했습니다.
세종 때 후궁으로 선발된 명의궁주 최씨는 조부가 개국공신과 원종공신이고, 부친은 판돈령부사까지 오른 고위 인사였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익숙한 후궁은 대개 비간택 후궁입니다.
폭군 연산군을 마음대로 휘둘렀다는 장녹수, 궁녀에서 정식 왕후까지 올랐던 희빈 장씨가 대표적입니다. 또 영조의 모친이자 드라마 '동이'로 잘 알려진 숙빈 최씨나 '여인천하'에서 "뭬야~"라는 대사로 유명한 경빈 박씨도 있습니다.
승은을 통해 후궁이 됐으니, 왕의 사랑을 듬뿍 받아서였을까요. 권력도 상당했습니다.

KBS 사극 '장희빈'에서 희빈 장씨(김혜수) [사진 KBS]

KBS 사극 '장희빈'에서 희빈 장씨(김혜수) [사진 KBS]

드라마 '여인천하'에서 경빈 박씨(도지원) [사진 SBS]

드라마 '여인천하'에서 경빈 박씨(도지원) [사진 SBS]

MBC 사극 '동이'에서 숙빈 최씨(한효주) [사진 MBC]

MBC 사극 '동이'에서 숙빈 최씨(한효주) [사진 MBC]

하지만 비간택후궁이라고 해서 모두 신분이 낮았던 것은 아닙니다.
희빈 장씨는 조상 대대로 역관을 배출한 중인 집안 출신인데, 희빈 장씨의 숙부는 무역을 통해 상당한 부를 축적한 갑부였다고 합니다.그 집안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왕실 집안과 주요 정치세력이던 남인과 긴밀하게 결탁할 수 있었습니다.
'여인 천하'로 유명한 경빈 박씨는 부친이 하급 군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성덕임은 어땠을까요.
성덕임의 아버지 성윤우는 혜경궁 홍씨의 부친 홍봉한 집의 청지기였고, 그 덕분에 성덕임은 10살 무렵 입궁해 혜경궁 홍씨의 궁녀가 됐습
니다.
그러니까 정조와 성덕임은 집안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던 사이인 것이죠.

MBC 사극 ‘옷소매 붉은 끝동’의 한 장면 [사진 MBC]

MBC 사극 ‘옷소매 붉은 끝동’의 한 장면 [사진 MBC]

그런데 이 집안은 원래 양반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가 사망하고 정조가 지었다는 어제의빈묘지명(御製宜嬪墓誌銘)에 따르면 성덕임의 조상 중에는 고려 때 가장 높은 벼슬인 문하시중에 오른 성송국, 조선 태종 때 예조·호조판서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성석인 등이 있습니다.
다만 이후 조상들이 연이어 과거 급제에 실패하면서 집안이 쇠퇴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조선에서는 4대(부친-조부-증조부-고조부) 안에 과거에 급제해 관료가 된 사람이 없으면 원칙적으로 양반에서 제외됐습니다.

성덕임은 왜 승은을 거부했을까
희빈 장씨의 사례가 잘 보여주듯이 국왕의 승은은 본인뿐 아니라 가족에게도 권력과 출세를 안겨주는 지름길입니다. 그래서 모든 궁녀의 '꿈'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래서 성덕임이 28세에도 승은을 거부했던 것은 참 이례적입니다. 그녀에게 정조는 이성적 매력이 없었던 것일까요. 이에 대해서도 뚜렷하게 밝혀진 것은 없으니 어디까지나 추정만 남게 됩니다.

당시 왕실의 외척이 된다는 것은 거대한 권력 게임 속에 던져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숙종 때의 희빈 장씨·인현왕후·숙빈 최씨, 영조 때의 혜경궁 홍씨와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만 봐도 그렇습니다. 복잡한 정치 싸움에 휘말리면서 '행복'이라는 단어와는 다소 거리가 멀었던 삶을 살았습니다.
특히 가까이에서 모셨던 혜경궁 홍씨가 당대 최고 권력 가문을 등에 업고도 불행하게 지낸 것은 필시 성덕임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 같습니다.

사도세자는 노론 내부의 부홍파(扶洪派)와 공홍파(攻洪派) 사이에 벌어진 권력다툼 과정에 휘말렸다. 공홍파는 사도세자를 공격해 당시 권력의 정점인 혜경궁 홍씨 집안을 끌어내리려고 했다. [사진 쇼박스]

사도세자는 노론 내부의 부홍파(扶洪派)와 공홍파(攻洪派) 사이에 벌어진 권력다툼 과정에 휘말렸다. 공홍파는 사도세자를 공격해 당시 권력의 정점인 혜경궁 홍씨 집안을 끌어내리려고 했다. [사진 쇼박스]

어렵사리 왕실의 일원이 됐지만 불과 넉 달 만에 벌어진 문효세자와 그녀의 죽음에 대해 당시에도 석연치 않다는 여론이 많았습니다.
처가 배경이 든든하지 않은 점, 국왕의 총애를 받고 세자를 낳았다는 점, 출산이 여전히 가능했다는 점 등을 들어 '독살설'이 돌기도 했습니다.

외국도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영국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바람둥이 헨리 8세의 마음을 사로잡아 이혼시키고, 왕비의 자리에 올랐지만 결국 왕자를 낳지 못하며 정치적 위상이 흔들리다가 누명을 쓰고 공개처형까지 됐으니까요. 왕의 여인이 된다는 것은 항상 마음을 졸이며 살아야 했던 것 같습니다.

BBC 드라마 '튜더스'에서 헨리 8세(조나단 리스 마이어스)와 앤 불린( 나탈리 도머) [사진 아마존]

BBC 드라마 '튜더스'에서 헨리 8세(조나단 리스 마이어스)와 앤 불린( 나탈리 도머) [사진 아마존]

조선 국왕의 후궁은 평균 6.4명 
이미선 한신대 한국사학과 교수가 쓴 『조선왕실의 후궁』에 따르면 27명의 조선 국왕은 평균 6.4명의 후궁을 맞이했습니다.
가장 많이 둔 왕은 현재 방영 중인 『태종 이방원』의 주인공인 태종으로 19명을 두었습니다.
그다음으로는 광해군 14명, 성종 13명, 고종 12명, 연산군과 중종 각각 11명 등인데, 현종이나 경종, 순종처럼 1명도 두지 않은 왕도 있었습니다. 모두 병약한 체질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평균(6.4명)보다 적었던 것은 순조(1명), 단종·헌종(2명), 인종·효종(3명), 인조·영조·정조(4명)입니다.

조선 초기엔 7.5명, 중기엔 6.8명, 후기엔 3.5명으로 갈수록 후궁의 수가 감소했습니다. 국왕들이 여색을 멀리해서였을까요.
정치적 변동이 영향을 줬을 수도 있습니다. 이미선 교수는 "희빈 장씨가 폐비된 뒤 숙종은 후궁이 왕비가 될 수 없도록 제도를 바꿨다. 그래서 이후엔 명망가에서는 후궁을 잘 보내지 않았다. 왕비가 될 가능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숙종 때 희빈 장씨로 '재미'를 본 정치권은 왕비나 후궁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는 비정상적인 폐단을 이어갔습니다. 숙종-영조-정조 때 유독 많은 후궁과 왕비들이 눈물을 흘렸던 것도 우연은 아닙니다.

권력자의 곁에 있다는 이유로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휘둘리는 여성들의 상황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것 같습니다. 대선 때마다 각종 구설에 오르내리거나 대선 후보 못지않게 혹독한 '통과 의례'를 거치게 되는 배우자들의 상황이 그렇습니다.

이른바 '혜경궁 김씨' 트위터 계정(@08__hkkim)의 소유주로 지목된 이재명 당시 경기도지사의 부인 김혜경 씨가 2018년 12월 4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수원지방검찰청에서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던 중 점심을 먹기 위해 청사를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이른바 '혜경궁 김씨' 트위터 계정(@08__hkkim)의 소유주로 지목된 이재명 당시 경기도지사의 부인 김혜경 씨가 2018년 12월 4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수원지방검찰청에서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던 중 점심을 먹기 위해 청사를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부인 김건희 코바나컨텐츠 대표가 2021년 12월 26일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에서 자신의 허위 이력 의혹과 관련해 입장문을 발표하고 있다. [뉴시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부인 김건희 코바나컨텐츠 대표가 2021년 12월 26일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에서 자신의 허위 이력 의혹과 관련해 입장문을 발표하고 있다. [뉴시스]

이 기사는 박현모 『정조평전』, 이미선 『조선왕실의 후궁』을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모비온

Innovation Lab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