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정화 함대 미스터리
정화(鄭和)가 지휘하는 명나라 함대가 1405~1433년 기간 중 여러 차례 남중국해와 인도양을 휩쓸고 다녔다. 한 차례 항해에 보통 2만 명 이상이 동원되었다니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1402년 영락제(永樂帝, 재위 1402~1424) 군대의 남경 함락 때 건문제(建文帝, 재위 1398~1402)가 해외로 피신했고 그를 포획하기 위해 이 함대가 출동했다는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오랫동안 떠돈 것은 이 거대한 사업의 목적을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원양 함대 안에 채마밭도 만들어
기록에 남아있는 선박의 크기부터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주력선인 보선(寶船)은 길이가 120m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 크기의 목조 선박이 공학적으로 가능한 것인지 의문이 제기되었다. (1805년 트라팔가해전에서 넬슨 제독의 기함이던 빅토리호가 서양에서 건조된 가장 큰 목조 선박의 하나로 아직까지 보존되어 있는데 약 70m 길이다) 2005년 이래 남경 부근 조선소 유적의 발굴을 통해 보선의 크기가 사실로 확인되었다.
120m 길이 주력선 등 수십척 운용
규모·위용 면에서 유럽 함대 압도
원나라 ‘세계제국’ 꿈 이어받았나
해외무역도 조공체제로 끌어들여
18세기까지도 왕성한 해상활동
과다 경비가 결국 짐으로 돌아와
유럽인의 대항해시대는 정화 함대보다 근 100년 후에 시작되었다. 유럽 연해에 묶여 있던 유럽인의 항해활동이 15세기 중엽부터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조금씩 확장되다가 콜럼버스의 대서양 횡단(1492)과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양 진입(1498)에 이른 것이다.
콜럼버스와 다 가마의 함대를 정화 함대와 비교한다면 코끼리 앞의 강아지랄까? 그들의 기함보다 더 큰 배가 정화 함대에는 수십 척이었다. 몇 척의 보선은 말할 것도 없고, 군대를 싣는 병선(兵船), 장비와 식량을 싣는 양선(糧船), 말을 싣는 마선(馬船) 한 척 한 척이 모두 후세 유럽인의 원양 함선보다 훨씬 더 컸다. 식수를 싣는 수선(水船)도 따로 있었고 큰 배에는 채마밭까지 두었다니, 이는 괴혈병에 대비한 것이었을까?
사업 규모에 비해 그에 관한 관변 기록은 매우 적다. 이 사업에 관한 언급을 기피하는 분위기가 오랫동안 명나라 조정에 있었고 당시 자료도 나중에 없앤 것이 많았다고 연구자들은 본다. 그래서 이 사업의 목적과 성격에 관한 억측이 아직까지 어지럽게 떠돌고 있다.
바닷길로 돌아간 마르코 폴로
영락제의 대함대 건조는 그에 앞선 원나라의 ‘세계제국’ 성격에 비추어 이해해야 할 것이다. 기원전 3세기에 세워진 ‘중화제국’은 외부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내향적 제국이었다. 서북방 유목민의 군사적 위협에 대응하는 외에는 찾아오는 ‘오랑캐’를 보듬어줄 뿐이지, 그들을 찾아갈 생각은 별로 없었다.
몽골제국은 이와 달리 유라시아대륙 태반을 정복하고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넓힌 외향적 제국이었다. 쿠빌라이(재위 1260~1294)가 원나라를 세울 때 몽골제국이 4한국으로 분열되었지만 그는 몽골 대칸(大汗)의 형식적인 자리라도 지켰다. 대칸의 권위를 끝까지 받들어준 일-칸국은 원나라와 특별한 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했다.
페르시아 지역의 일-칸국과 원나라 사이에는 적대적인 차가타이 칸국이 자리 잡고 있어서 육상교통이 어렵게 되었고 해로를 많이 이용하게 되었다. 마르코 폴로도 일-칸국에 시집가는 원나라 공주를 모시는 배를 타고 일-칸국으로 갔다가 유럽으로 돌아갔다.
이 시기까지 인도양과 남중국해의 교역활동은 많이 자라나 있었지만 중국과 페르시아 사이의 직항로는 활발하지 못했다. 말라카해협을 경계로 두 해역의 계절풍 양상이 다르기 때문에 상선들은 어느 한 해역에서만 활동하고 두 해역을 모두 통과하는 화물은 경계 지역의 중계무역에 의존했다. 마르코 폴로가 일-칸국까지 가는 데도 2년의 시간이 걸렸고, 그 사이에 일-칸국의 아르군 칸이 죽었기 때문에 그와 결혼하려고 간 코코친 공주는 그 아들 가잔 칸과 결혼해야 했다.
세계제국의 꿈을 버리지 못한 쿠빌라이에게는 인도양-남중국해의 제해권이 큰 과제였다. 그러나 1292년 자바 원정에 실패하고 그가 죽은 후 이 과제는 원나라가 명나라에 몰려날 때까지 되살아나지 못했다. 100여 년 후 영락제가 만든 대함대의 파견 지역에 관한 정보는 쿠빌라이에게 물려받은 것이었다. 세계제국의 꿈도 쿠빌라이에게 물려받은 것인지 알 수 없다.
‘닫힌 제국’으로 돌아온 명나라
중화제국 초기에는 경제활동 중 농업의 비중이 컸고, 따라서 경제력 통제도 농지 중심으로 행해졌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비중이 자라난 상업은 농업에 비해 통제가 힘들었다. 송-원 시대에 크게 늘어난 해외무역은 국가의 통제가 특히 힘든 영역이었다. 영락제의 함대는 해외무역을 조공체제의 틀에 최대한 수용하려는 시도였지만 장기간 계속하기에 너무 큰 비용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이런 통제력 강화가 ‘국가주의’ 경향으로 비판받기 쉽다. 그러나 이런 국가주의가 역사 속에서는 엄연히 중화제국의 표준 이념이었다. 제국이 ‘천하’에 대해 책임을 가진다는 이 이념으로는 해외무역 역시 천하 안에서 이뤄지는 것이므로 국가가 방기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중국의 전통적 천하관은 하나의 ‘닫힌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폐쇄성이 근대화 과정에서 많은 비판(중국 지식인들의 자기반성 포함)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환경학자 바츨라프 스밀이 주간 ‘노에마(Noema)’ 인터뷰(2021년 2월 27일자)에서 한 말을 보며 다시 생각해본다.
“일론 머스크(스페이스-엑스 우주개발 사업의 추동자)가 아무리 열을 올려봤자 화성 식민지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 이것이 우리가 가진 유일한 생태계이고 바로 지금 여기서 우리가 잘 관리해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의 생태계는 연약하면서도 다행히 저항력을 가진 것입니다. 생태계에 회복 능력이 있다는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회복 능력이 사라지는 어떤 한계가 있다는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우리가 어느 정도 파괴해도 생태계는 원래 모습을 찾으려 들지만 한도가 있는 일입니다.”
근대세계의 번영은 ‘외부’ 자원의 착취를 발판으로 이뤄졌다. 그래서 ‘열린 세계관’을 받든 것이다. 지구화의 진행으로 지구상에 더 이상의 외부가 없게 되자 지구 밖의 외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닐 암스트롱의 달 착륙(1969) 이후 더 이상 그 길이 열리지 않자 이제 우리의 ‘유일한 생태계’를 다시 바라보게 된 것이다. 막강한 함대를 갖고도 세계정복에 나서지 않은 명나라의 ‘닫힌 세계관’도 다시 평가할 때가 되었다.
앞만 보고 달린 근대화, 지금 되돌아보는 이유
중국과 일본은 1860년대에 양무(洋務)운동과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의 길을 열었고 조선도 곧 개화(開化)운동으로 뒤를 따랐다. 그로부터 100년은 동아시아 여러 국가와 사회에 근대화의 시대였다. 한국에서는 1970년대까지 ‘조국 근대화’가 국가적 과제였다.
21세기에 깊숙이 들어온 이제 ‘근대화’의 의미를 돌아본다. 자원과 환경 등 인류 공동의 문제부터 질서와 삶의 질 등 우리 사회의 문제까지, 오늘의 우리를 불안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문제는 근대화가 모자란 결과일까, 아니면 지나친 결과일까?
근대화의 시대는 앞만 보며 달린 시대였다. 역사의 고찰도 19세기 후반애 정해진 ‘근대’의 기준에 묶여 있었다. 근대화도 이제 하나의 역사적 현상으로 냉철하게 되짚어볼 때가 되었고 그를 위해서는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다. 근대화의 과제가 어떤 상황에서 제기된 것인지도 따져보고, 그 과제를 나란히 맞은 동아시아 여러 사회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도 비교해가며 살펴보려 한다.
정화 함대로 고찰을 시작한다. ‘서세동점’의 물결에 앞서 오히려 ‘동세서점’의 기세를 보인 일이었다. 유럽은 16세기에 대항해시대를 시작했지만 그 해상활동 능력은 15세기 초 명나라 함대의 위용을 18세기까지도 따라오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명나라는 함대 운용을 스스로 중단했다. 명나라는 왜 그 거대한 함대를 만들고, 또 얼마 후 그 함대를 버린 것일까?
◆김기협
중국 역법과 동서교섭사를 연구해 온 역사학자. 『밖에서 본 한국사』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해방일기』 등의 저서가 있고 월간중앙에 ‘오랑캐의 역사’를 연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