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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양 여성도 재테크 ㆍ상업 활동 뛰어들었다

중앙일보

입력

신윤복 '주사거배' [사진 간송미술문화재단]

신윤복 '주사거배' [사진 간송미술문화재단]

최초의 근대적 인구센서스는 광무호적이다.
1896년 9월 1일 반포된 칙령 제61호 [호구조사규칙]과 9월 3일 내부령 제8호 [호구조사세칙]에 의거해 1896년~1908년 조사됐다.

서울역사박물관 『한양의 여성 공간』발간

광무호적에서 한성부(서울)의 세대주는 1만2659명, 585명의 세대주가 여성이다. 이중 60명은 직업이 기록되어 있는데, 가장 많은 직업은 상인으로 14명, 그 외에도 상궁, 농민, 객주, 수공업자, 교사, 술집 등 다양했다.
최고령자는 광통교 인근 원동에 사는 93세 황조이씨로 직업은 침공(針工·바느질). 최연소 여성 세대주는 순화동 인근에 사는 김조이씨(33세)로진명여학교 교사였다. 그것도 기와집 34.5칸, 초가 8칸으로 가장 큰 규모의 집을 소유. 조이(召史)는 양민의 아내나 과부를 일컫는 단어다.

서울역사박물관이 7일 발간한 보고서 『한양의 여성 공간』은 조선 시대 수도 한양에서 활동한 다양한 계층의 여성들의 삶을 복원했다. 왕비부터 비구니, 무녀, 여상상인, 양반집 부인 등 저마다 갖가지 사연을 갖고 곳곳에 자취를 남겼다.

신당동(神堂洞)과 무원교(巫院橋)는 조선 시대 무녀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다. 조선 성리학자들로부터 음사(陰祀)의 대상으로 비난받기도 했지만, 세종조차도 병마를 이기기 위해 이들에게 의지하기도 했다. 국왕이 이런데 양반 등 일반 백성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래서 조선은 이들의 역할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도성 밖에서 전염병을 치료하고 백성 구휼 활동을 담당했던 활인서에 배속했다. 무녀들은 국가로부터 인정받은 대가로 활인서 운영에 필요한 재원(무세·巫稅)을 납부하기도 했다. 서울역사박물관 측은 “이번 연구를 통해 무녀를 의료 및 사회복지 업무에 종사한 여성 전문직업인으로 재조명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한양 서쪽 활인서 인근 무녀들의 집거촌. 〈수선전도〉에 표기.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한양 서쪽 활인서 인근 무녀들의 집거촌. 〈수선전도〉에 표기.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당시에도 한양은 물가가 비쌌기 때문에 조선 후기로 갈수록 치산이재(治産理財)가 중요한 덕목으로 인식됐다.
실학자 이덕무가 "선비의 아내가 생활이 궁핍하면 얼마간 생계를 꾸리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길쌈하고 누에 치는 일이 원래 부인의 본업이지만, 닭과 오리를 치는 일, 장초·술·기름 등을 파는 일, 대추·밤·감·귤·석류 등을 잘 저장해두었다가 때를 기다려 내다 파는 일, 홍화·자초·단목 등을 사서 쌓아두는 일은 괜찮다. 염색법을 배워 아는 것도 생계에 도움이 된다"고 기록한 것은 일반 양반집 부인도 기초적인 상업에 뛰어들곤 했음을 반영한다.

양반 여성들은 남편을 대신해 전답을 경영하거나 고리대를 통해 재산을 불리기도 했다.
18세기 중반 이재운이 지은 ‘해동화식전’에는 양반 김극술의 처 박씨의 사연이 나온다.

가세가 기울자 부인 박씨는 남편의 허락을 받아 논밭과 저택을 모조리 팔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녀는 셋방에 살면서 종을 시켜 도성 안팎에서 당귀를 모두 사들였고, 한달 후 한양에서 당귀가 동나자박씨는 비싸게 되팔아 반년 만에 원금의 90%를 벌어들였다고 한다.

아예 전문적인 경영인으로 나선 경우도 있었다.
조선은 도성 안팎에 채소전·과일전·침자전·분전·족두리전·자반전 등 여성에게 특화된 상업 점포를 열도록 허용하고 이를 정부에서 관리·감독했다. 대신 이들은 국가에 각종 물품을 대주는 국역을 담당했다. 이들을 여인전(女人廛)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정조가 신해통공을 통해 '금난전권'을 폐지하면서 문제가 벌어졌다. 정조 23년(1799년) 『일성록』에는 신해통공으로 인해 장사가 어려워진 여인전에서 '더는 정부에 물품을 대주기 어려우니, 국역을 폐지해달라'고 청원하는 내용이 나온다.

한양에서 여성이 경영한 여인전의 위치. 〈수선전도〉에 표기. 별표는 기방과 색주가.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한양에서 여성이 경영한 여인전의 위치. 〈수선전도〉에 표기. 별표는 기방과 색주가.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구한말 방한했던 스웨덴 기자 아손 그렙스트는 "코레아의 여성들이 찾는 직업 중 가장 수입이 좋은 것은 무기(舞技)이고, 그다음으로 의사 곡예사 순이고 만담가도 수입이 상층에 속한다"고 기록했는데 하층 여성의 경우는 대개 주막을 경영한다든지 누에치기와 누에 판매 등의 사업에 손을 대는 경우가 많았다. 영조 40년(1764년) 4월 24~26일에는 도성 내 불법 양조를 단속했는데, 적발자의 남녀 비율은 3:8로 여성이 더 많았다.

한편 서울역사박물관은 각종 기록 등을 토대로 한양의 여성 인구는 17세기 11만여명에서 19세기 말 16만여명까지 증가했으며, 정조 집권기 중반을 제외하고는 대개 여성 성비가 높았다고 분석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한양 도성 안은 남자보다 여자가 많은 ‘여초도시’였다”며 “여성들은 사회가 강요하는 유교적 여성관에 매몰되지 않고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는 종교활동과 가계 살림에 보탬이 되는 상업활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한양의 도시 공간을 더욱 활기찬 삶의 공간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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