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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상언의 시시각각

멸치·콩·수박·처음처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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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제공 요청 기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문서(공문) 번호: 수사3부-366. 제공 요청 사유: 전기통신사업법 제83조 제3항에 따른 법원/수사기관 등의 재판, 수사(「조세범 처벌법」 제10조 제1항·제3항·제10항의 범죄 중 전화, 인터넷 등을 이용한 범칙사건의 조사를 포함), 형의 집행 또는 국가 안전보장에 대한 위해를 방지하기 위한 정보 수집. 제공 일자: 2021년 10월 1일. 제공한 통신자료 내역: 고객명, 주민등록번호, 이동전화번호, 주소, 가입일, 해지일.’

지난 9일, 이런 내용의 SK텔레콤 e메일 문서를 받았다. 지난해 10월 1일 공수처 수사3부에 내 전화번호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이름에 주민등록번호와 주소까지 포함해 알려줬다는 지극히 사무적인 고지였다. 후배 기자들이 공수처의 ‘통신 조회’를 당한 게 속속 드러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통신사에 ‘통신자료 제공 사실 열람’ 요청을 했더니 6일 만에 그렇게 답이 왔다. ‘혹시나’는 공수처 수사 대상에 오른 인물들과 지난 1년 동안(통신사의 조회 기간이 1년이다) 통화를 한 적이 ‘거의’ 없다는 기억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물론 나는 공수처의 수사 범위를 알 수 없다.

공수처, 본지 기자 31명 통신 조회
자유와 인권 침해 조직으로 전락
‘멸공’ 외침 확산 분위기에도 한몫

e메일이 열리고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라는 열 글자가 보이는 순간 누군가로부터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그저 당한 사람만 억울한 느닷없는 봉변을 겪은 기분이었다. 며칠 새 “훈장이라고 생각해”라는 농담조의 덕담, “그거 어떻게 알아보는 건지 알려줘” 등의 문의 요청을 꾸준히 받았다.

개인정보를 가져간 공수처 수사3부는 이성윤 고검장 공소장 유출 사건과 속칭 ‘고발 사주 의혹’을 수사 중이다. 그동안의 공수처 해명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경우 수사 대상자(피의자 또는 참고인)의 통신 내역에 내 전화번호가 떠 그 번호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통신사에 물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공수처가 나를 겨냥해 ‘사찰’했을 것이라고 의심할 만큼 자의식이 크지는 않다.

왜 공수처가 내 전화번호의 가입자 정보를 통신사에 요청했는지를 알아보기로 했다. 별 소득이 없을 것이라고 짐작하면서도 시민 의식과 기자의 책무감이 동시에 발동해 대변인실 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사 중인 사안이라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할 수 없다.”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답이 돌아왔다. “전혀 방법이 없는 것이냐”는 질문에는 “정보공개 청구 절차를 밟을 수 있다”고 했다. 그들은 통신사에 달랑 공문 한 장 보내서 내 개인정보를 가져갔는데, 나는 그 이유를 알기 위해 길고도 복잡한 행정절차를 밟아야 한다. 청구가 받아들여진다는 보장도 없다.

13일 기준으로 총 31명(건수로는 56개)의 중앙일보 기자가 공수처의 ‘통신 조회’를 당했다. 한 후배 기자의 어머니도 당했다. 그것은 법원에서 영장을 받아 그 기자의 통신 내역 전체를 들여다본 뒤 통화 상대방의 통신사 가입 정보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31명 중 3분의 1가량은 그 기자가 들어 있는 카카오톡 대화방의 멤버라서 통신 조회를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이라면 공수처가 중앙일보 업무용 메신저 대화방까지 털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 기자는 지난해 5월에 이성윤 고검장 공소장 내용을 보도했다. 공수처는 기자의 취재 경로가 몹시도 궁금했던 듯하다. ‘조국 사태’ 이전까지 검찰은 모든 공소장을 언론에 공개했다.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의 주장과 달리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공소장은 비밀문서가 아니다. 어차피 재판이 시작되면 다 알려지는 내용이기도 하다.

한 대기업 CEO의 ‘멸공’ 외침이 주목받은 것은 소련·동독·중국·북한과 비슷한 정보 검열과 인권 무시의 풍조가 우리나라에 퍼지고 있다는 다수의 생각 때문이다. 여기에 한몫한 게 공수처다. 이런 기관은 사라져야 한다. 마트에 들러 멸치·콩·수박·처음처럼 소주를 사야겠다. 한겨울이라 수박이 없으면 수박맛바를 대신 집어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