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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윤석만의 직격인터뷰

태종은 리얼리스트, 계파 떠나 국가적 과제에 몰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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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윤석만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태종처럼 승부하라』 낸 박홍규 교수

지난달부터 방영을 시작한 사극 ‘태종 이방원’. 태종은 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조선 건국에 앞장선 혁명가였지만, 조선 왕 중 유일하게 과거에 급제한 성리학도였다. [사진 KBS]

지난달부터 방영을 시작한 사극 ‘태종 이방원’. 태종은 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조선 건국에 앞장선 혁명가였지만, 조선 왕 중 유일하게 과거에 급제한 성리학도였다. [사진 KBS]

조선의 임금 중 평가가 가장 엇갈리는 인물 중 한 명이 태종이다. 피의 화신으로 묘사되지만, 세종의 치세를 연 수성의 군주기도 하다. 올해 서거 600주년을 맞은 그를 대선을 50여 일 앞두고 재조명해 봤다. 현재의 한국사회가 여말 선초의 혼란한 시대 상황과 닮은 점이 많기 때문이다. 얼마 전 『태종처럼 승부하라』를 출간한 박홍규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를 만나 태종의 시각에서 2022년 한국 정치를 들여다봤다.

박홍규

박홍규

왜 태종인가.
“지금의 한국 정치는 87년 체제의 한계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민주주의가 수 싸움으로 귀결돼 정치가의 입지가 좁아졌다. 매일 여론을 신경 써야 하고 진영 논리에 휘말려 뜻을 펼치기 어렵다.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는 정착됐지만, 정치가의 역할은 쪼그라들었다. 온갖 역경을 이겨낸 태종 같은 리더십이 절실한 상황이다.”

여론에 밀리지 않는 리더십 실천
권력 한계 깨닫고 공론정치 열어
요즘 대선주자들은 표에만 집중
“연금개혁 등 욕 먹어도 결정해야”

그게 어떤 리더십인가.
“여론에 밀리지 않고, 수 싸움에 끌려가지 않는 주체적 결단의 리더십이다. 개헌이나 연금 문제를 보자. 대통령이 되면 권력을 내려놓기 싫고, 괜한 일을 벌여 국민에게 쓴소리 듣기를 꺼린다. 하지만 그런 결단을 내리는 게 최고 통치자의 역할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조국 사태나 추미애·윤석열 대치처럼 통치자의 결단이 필요한 순간마다 뒤로 숨었다.”
욕을 먹어도 할 일은 하는 게 대통령이란 뜻인가.
“그렇다. 어려운 결정을 내리기 때문에 많은 권한과 책임을 부여하는 것이다.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례를 보자. 대다수 지지자가 등을 돌렸지만 미국과 FTA를 체결하고, 이라크에 파병했다. 국익을 위해서 한 거다. 그러나 지금의 정치인들은 자신의 표 깎아먹을 일은 하지 않는다.”

‘선죽교 사건’ 어떻게 볼 것인가

이재명

이재명

박 교수는 태종이 행했던 결단의 순간 중 하나로 ‘선죽교 사건’을 꼽았다. 1392년 3월 17일 이성계가 사냥 도중 낙마해 중상을 입자, 정몽주는 혁명세력을 제거할 기회로 여겼다. 4월 1일 공양왕에게 압력을 넣어 정도전 등 이성계의 무리를 모조리 잡아들였다. 이때 선제공격하자던 자신의 주장을 이성계가 받아들이지 않자, 이방원은 독자 행동에 나섰다.

박 교수는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정몽주를 암살하면서 혁명가 이방원이 탄생했다”며 “도덕적 비난을 무릅쓰고도 부패한 고려를 무너뜨리기 위한 결정타를 날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몽주 암살은 윤리적으로 지탄받을 수는 있지만, 조선 건국이라는 시대적 명분을 위해선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했던 ‘네체시타(necessita)’였다는 이야기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주어진 운명(fortuna·포르투나)을 용기있는 결단(virtu·비르투)으로 극복하는 자가 군주라고 했다. 그러면서 정상적인 상황을 벗어나 반도덕적 행동이 용인되는 불가피한 국면(네체시타)에선 비르투를 발휘할 수 있어야 진정한 리더라고 강조했다.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가 쌍둥이 동생 레무스를 죽일 때도 네체시타로 봤다.

정몽주 암살을 바라보는 일반적인 시선은 곱지 않다.
“미화할 생각은 없지만, 당시 현실에선 어쩔 수 없었다. 죽이지 않으면 죽임을 당하는 상황이었다. 이방원 개인의 영욕을 위한 게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결단이었다. 맹자의 역성혁명론에 따라 정도전 같은 신진사대부가 꿈꾸는 성리학적 세계관 안에선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이후 계속된 학살도 같은 논리였을까.
“그렇진 않다. 1398년과 1400년 2차례 벌어진 ‘왕자의 난’에선 권력을 얻기 위해 동생과 측근까지 무참히 살해했다. 태종은 집권과정에 빚어진 폭력도 성리학으로 치장하려고 했지만, 이것까지 네체시타로 인정하긴 어렵다. 국가와 공동체를 위한다는 합리적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폭력을 성리학으로 미화하기도

윤석열

윤석열

태종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그가 권근과 하륜이다. 특히 하륜은 이성계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방원이 자신의 형제와 개국공신까지 제거한 일을 ‘불효’가 아닌 ‘대효’라고 주장했다. 1408년 6월 25일 영의정 하륜은 상소문에서 “간신들을 제거해 종사를 안정시켰으니 부왕에게 대효를 행한 것”이라고 했다.

진실을 거짓말로 속이는 모습이 현실 정치인과 닮았다.
“권근과 하륜은 쿠데타를 치장하는 데 성리학을 이용했다. 586 집권세력도 말로는 민주주의를 외치지만, 실제 모습은 동떨어져 있다. 적폐청산도 명분과 달리 반대 정파를 공격하는 데에 쓰인 면이 있다. 정치는 권력의 한계를 자각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데, 그걸 못하니 횡포가 돼버린다.”
다수결만 강조하면 민주주의의 위기를 부른다.
“태종이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잡았지만, 반대파를 무조건 숙청만 한 건 아니다. 집권 후에도 이성계와 개국공신의 견제를 받았다. 자기 뜻과 다르다고 모조리 죽일 순 없다. 자기가 가진 권력의 한계를 파악하고, 그 안에서 국정을 운영한 정치적 리얼리스트였다. 그래야만 타협과 협상이 나온다. 현대 민주주의의 본질도 다수결이 아니라 소수자 보호와 3권 분립이다.”
이성계·이방원의 사병 조직은 오늘날 정치인의 팬덤과 흡사한데.
“‘가별치’는 주군과 운명공동체였다. 일당백이라 고려의 군사들과 비교가 안 됐다. 오늘날에도 큰 정치가로 성장하려면 팬덤이 필요하다. 그러나 폭주하게 놔둬선 안 된다. 적절히 관리하고 통제해야 한다. 이방원도 집권 후 사병 혁파에 힘썼다. 그런 의미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과거 ‘양념’ 발언은 잘못됐다. 팬들의 폭력적 행위를 용인한 꼴 아닌가.”

1410년 태종은 선왕의 위패를 종묘에 모시며 ‘유신의 교화(維新之化)’를 공포했다. 유교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겠다는 취지다. 실록에는 집권 후반기에 본인이 과거 급제한 문인 출신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모습도 보인다. 박 교수는 이를 “피의 군주 이방원이 공론(公論)의 정치가로 재탄생한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태종은 의정부와 6조 체제를 정비해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가 꿈꿨던 성리학적 공론 정치를 제도화했다. 왕과 신하가 함께 공부하며 토론하는 경연을 도입하고 사간원을 별도 기관으로 독립시켜 언론의 자유를 보장했다. 백성들의 노역을 줄이고 강제 동원을 시정하며 애민(愛民) 군주의 모습도 보였다.

이재명은 돌파력, 윤석열은 결단력

태종 이방원의 생애

태종 이방원의 생애

태종의 공론 정치는 어떤 식이었나.
“노비의 소유권 분쟁을 해결하는 노비중분법을 시행할 때의 일이다. 신하들과 토론을 반복하며 제도를 보완했다. 신하들의 공세에 밀리는 경우도 많았다. 한양 환도(還都)와 예법 정리 때도 공론 정치를 실천했다. 태종이 성리학적 국가의 기틀을 다져놨기 때문에 세종의 치세도 가능했다.”
피의 군주에서 유교적 군주로 갑자기 변한 건 왜일까.
“그에겐 ‘성군의 꿈’이 있었다. 아버지나 다른 형제들과 달리 과거에 급제한 문인 출신이다. 정도전 등과 교류하며 성리학을 체득했다. 비록 집권 과정에서 폭력을 일삼았지만, 마음속엔 늘 성리학을 품고 있었다. 폭력 군주라는 트라우마가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사라지면서, 유교적 군주로 매진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본다.”
두 달 후 대선이다. 태종의 시각에서 후보들을 평가해 본다면.
“이재명 후보는 태종의 기민함을 닮았다. 위기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돌파하는 감각적 본능과 유연성이 비슷하다. 윤석열 후보에겐 태종의 결기가 느껴진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발언이나 조국·추미애 등에 맞서 싸운 모습을 강단 있게 봤다.”
두 후보에게 태종이 조언한다면.
“이 후보에겐 집권 후를 그려보라고 할 것 같다. 기민함만으론 통치자가 될 수 없다. 대한민국의 정체성, 미래 비전이 중요하다. 태종이 공론 정치를 펼 수 있던 건 오랜 시간 국가운영의 철학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권력을 잡는 것보다 통치자의 역량을 갖추는 게 더욱 어렵다. 윤 후보의 경우 자신에 대한 열망이 가장 높았던 때가 언제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오세훈 시장과 이준석 대표 당선 때의 민심을 떠올려 보라. 청년들의 지지를 받으며 내일을 향해 나아갈 때였다. 혼란과 잡음을 걷어내려면 ‘윤석열다운’ 결단과 용기를 다시 보여줘야 한다.”

1418년 6월 3일 태종은 양녕을 세자의 자리에서 폐하고 며칠 뒤 충녕을 책봉했다. 박 교수는 “성군의 꿈을 이어갈 재목으로 셋째 아들을 택했다”며 “정도전 등이 꿈꿔왔던 성리학적 국가의 완성을 위해 내린 결단”이라고 평가했다. 두 달 뒤 충녕은 왕위에 올랐고, 세종의 치세는 32년간 계속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