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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벤처 육성 강조하면서 복수의결권 막는 이율배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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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2021년 12월 8일 오전 서울 금천구 가산디지털 SKV1 한국산업단지 경영자연합회 회의실에서 중소.벤처기업 정책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2021년 12월 8일 오전 서울 금천구 가산디지털 SKV1 한국산업단지 경영자연합회 회의실에서 중소.벤처기업 정책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노동이사제 속전속결, 벤처 지원은 외면

선거용 ‘친기업’ 아니라면 행동 보여야

명백한 자가당착이자 이율배반이다. 앞에선 벤처기업 육성을 말하면서 뒤로는 벤처 업계의 오랜 숙원인 ‘복수(차등)의결권’ 법안 처리를 가로막은 여당의 모습이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는 지난해 12월 2일 벤처기업에 한해 복수의결권을 도입하는 법안을 의결하고 법제사법위원회로 넘겼다. 벤처기업 창업자들이 경영권을 빼앗길 것을 걱정하지 않고 대규모 투자를 유치할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다. 그런데 지난 10일 법사위에선 일부 여당 의원의 반발로 관련 법안을 상정조차 하지 않았다. 결국 이번 임시국회에서 복수의결권 법안 처리는 무산됐다. 반면에 경제계가 심각한 우려의 입장을 밝힌 공공기관 노동이사제 법안은 속전속결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미국·이스라엘·영국·스웨덴 등 벤처 생태계가 활성화한 대다수 선진국은 복수의결권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이런 세계적인 흐름에서 우리는 많이 뒤처졌다. 문재인 정부는 그동안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복수의결권 도입 의지를 밝혀 왔다. 더불어민주당은 2020년 21대 총선에서 복수의결권 도입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문 대통령도 지난해 8월 벤처 행사에서 “법안의 조속한 통과를 위해 국회에 협조를 구하겠다”고 거들었다. 그런데도 법안 처리는 기약이 없다.

일부 여당 의원은 재벌 특혜 가능성을 거론한다. 법안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았거나, 알고도 일부러 외면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현재 법안에는 벤처기업이 공시 대상 기업집단(자산총액 5조원 이상)에 속하는 순간 복수의결권의 효력을 상실하도록 규정했다. 대기업 총수 일가나 계열사가 복수의결권을 활용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 이 밖에도 제도의 남용을 막는 이중·삼중의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비상장 벤처기업에서 대규모 투자 유치로 창업자 지분율이 30% 이하로 떨어진 경우에만 1주당 최대 10개의 의결권을 부여한다. 이런 복수의결권은 상속이나 증여를 할 수 없다. 벤처기업이 증시에 상장한 때는 유예기간을 두고 보통주로 전환하도록 했다. 일부에선 복수의결권에 반대하는 이유로 투자자 보호를 내세우지만 정작 벤처기업에 투자하는 주체인 한국벤처캐피탈협회는 적극 찬성하는 입장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는 어제 기업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벤처기업의 성장을 촉진하는 혁신 생태계를 조성하겠다”고 말했다. 하루 전에는 ‘세계 5강 국가’를 내세우며 디지털 대전환과 135조원 이상의 과감한 투자를 언급했다. 하지만 복수의결권처럼 세금 한 푼 들이지 않고 벤처 생태계 활성화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은 모른 체한다. ‘친기업’을 말하지만 실상은 ‘반기업’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는 이유다. 이 후보의 벤처 육성이 공허한 메아리에 그치지 않으려면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