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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입고 버리는 옷까지…ZARA보다 더한 패스트패션의 민폐 [패션, 지구촌 재앙 됐다]

중앙일보

입력

지난달 19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에서 연말 세일 행사 중인 패스트패션 브랜드 앞에서 소비자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전영선 기자

지난달 19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에서 연말 세일 행사 중인 패스트패션 브랜드 앞에서 소비자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전영선 기자

지난달 19일 서울 강남구 가로수길 자라(ZARA) 매장. 연말 세일 4일 차를 맞아 매장은 손님으로 꽉 차 있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중증 환자가 1000명을 넘어선 날이었지만 지하 1층, 지상 2층 매장은 30~50% 인하된 옷을 바구니에 담는 쇼핑객으로 가득했다. 세일 전 1만2000원이던 티셔츠는 8000원에 팔리고, 겨울 쇼트 패딩은 7만원대, 롱패딩은 10만원대 정도였다. 모두 불과 몇 주 전 겨울 시즌을 겨냥해 만들어진 상품이다.

지난해 19일 세일 행사 중인 패스트패션 브랜드 자라 지하 1층에 설치된 헌 옷 수거함. 전영선 기자

지난해 19일 세일 행사 중인 패스트패션 브랜드 자라 지하 1층에 설치된 헌 옷 수거함. 전영선 기자

자라 모 기업 인디텍스는 ‘옳은 패션(Right Fashion)’ 구호를 내걸고 변화를 장담한다. 패션 환경 오염의 ‘주범’으로 지목된 패스트패션(SPA)의 이미지를 쇄신하겠다는 취지다. 2025년부터 사용 자재의 100%를 유기농ㆍ재사용 등 지속가능한 소재로 바꾸고 제작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날 매장에선 이런 움직임을 체감할 만한 것은 거의 없었다. 자라는 입지 않는 옷을 수거해 어려운 기부하는 등의 활동 하고 있다고 홍보해왔다. 자라 가로수길 매장에도 지하 1층 엘리베이터 옆에 소형 세탁기 크기의 기부함이 설치돼 있었다. 오후 내내 이용자를 만나진 못했다.

자라는 이 캠페인을 통해 지난 5년간 94개국에서 헌 옷 6만2000t을 수거했다. 매년 9억벌 상당의 옷을 생산하는 것을 생각하면 재활용 의지가 강하다고 믿긴 어려운 실적이다. 자라코리아 관계자는 “옷 수거함은 한국 자라 매장 53개 중 52개 매장에 설치돼 있다”며 “얼마나 수거해 어떻게 이용하는지 국가별 데이터를 공개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패스트패션 10년 뒤 사라질 수도”

패스트푸드 업계의 맥도날드처럼 자라는 패스트패션의 상징이다. ‘패션쇼 런웨이에 오른 제품을 15일 안에 대량 공급한다’는 자라가 1989년 뉴욕에 상륙하자 뉴욕타임스가 이 사업 형태를 ‘패스트패션’이라고 소개하며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H&M, 갭(GAP)과 함께 패션의 역사를 바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패션 동향을 빠르게 잡아 채 주머니가 가벼운 사람도 트렌드세터가 될 수 있도록 하는 자라의 ‘칩 앤 시크(Cheap and Chic)’ 전략은 패스트패션 사업의 핵심이 됐다. 가난해도 멋질 수 있다는 선언은 ‘패션의 민주화’로 불리며 기존 명품 브랜드에도 영향을 미쳤다.

데이터 분석 기관 케임브리지 이코노매트릭스 분석에 따르면 2018년 기준 미국 시장에서 옷과 신발의 가격은 1990년의 반값이다. 패스트패션 천국 영국에선 90년의 4분의 1의 가격으로 옷을 살 수 있다. 여기에 이젠 중국이 패스트패션에 눈을 떴다. 스위스 투자 은행 UBS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2006년 연간 평균 새 옷 14벌을 장만하던 중국 소비자는 2019년엔 이의 두 배 이상을 샀다.

패스트패션 산업은 여전히 연간 3%씩 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패스트패션 시대의 종말을 예견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유럽 최대 온라인 패션몰 잘란도(Zalando)의 로베르트 겐츠 공동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파이낸셜타임스 인터뷰에서 “패션 산업은 세계적인 지속 가능성 문제의 일부분”이라며 “세계 의류 업계는 향후 10년 안에 패스트패션 사업 모델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밝지 않은 전망을 반영해 인디텍스와 H&M의 주가는 지난 5년간 정체돼 있다.

지난 5년간 H&M 주가 흐름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지난 5년간 H&M 주가 흐름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지난 5년간 자라 브랜드의 모기업 인디텍스의 주가 흐름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지난 5년간 자라 브랜드의 모기업 인디텍스의 주가 흐름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UBS도 향후 5~10년 사이 패스트패션 기업이 수익의 30%가 감소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보고서는 “소비자가 옷을 덜 사고 보다 지속 가능한 제품을 사는 경향이 누적되면 패스트패션 기업에 최악의 시나리오가 전개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한인판 자라’를 꿈꾸다 2019년 파산해 헐값으로 매각된 미국 포에버21은 패스트패션 산업의 쇠퇴를 엿볼 수 있는 사례다. 80년대 옷 도매 시장 상점으로 시작한 포에버21은 한때 57개국에 점포 800여개를 두고 미국 시장점유율 1위에 오르면서 승승장구했다. 워싱턴포스트는 ”포에버21은 패스트패션 모델을 만드는데 ‘원죄’가 있는 업체 중 하나로 이의 파산은 산업을 바꿀 큰 움직임의 일부“라고 진단했다.

줄어드는 패스트패션시장 성장세.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줄어드는 패스트패션시장 성장세.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의류생산 섬유의 1%만 옷으로 재탄생 

현시점에선 패션 기업이 내놓는 지속가능성 전략이 실제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지적도 많다. 한 패션 브랜드의 옷 수거 사업에 협력하고 있는 한 의류 재활용 시민단체 관계자는 “패스트브랜드 수거량은 얼마 안된다”며 “솔직히 면죄부를 받기 위한 것 같다”고 말했다. 헌 옷을 가져가면 자사 할인 쿠폰을 주는 것도 '마케팅의 일환'으로 해석될 수 있다. 엘렌 맥아더 재단 섬유 보고서에 따르면 2015년 기준 의류 생산에 투입된 섬유(연간 9200만t) 중 1%만 옷으로 재탄생한다. 폐의류의 절반 이상(57%)이 매립되고 25%는 소각된다.

'전자상거래업계의 틱톡'으로 명명된. 중국 온라인 쇼피몰 쉬인. 패스트패션보다 더 빠르고 싼 울트라패스트패션, 실시간패션으로 불린다. [쉬인 홈페이지]

'전자상거래업계의 틱톡'으로 명명된. 중국 온라인 쇼피몰 쉬인. 패스트패션보다 더 빠르고 싼 울트라패스트패션, 실시간패션으로 불린다. [쉬인 홈페이지]

환경파괴 쟁점된 '실시간 패션'

데이터로 무장해 기존 패스트패션 브랜드보다 싸고 빠르게 신상품을 공급하는 ‘실시간 패션(Real Time Fashion)’ 돌풍도 패스트패션 전망을 어둡게 한다. 지난해 초 미국과 유럽의 Z세대는 중국 온라인 쇼핑몰 쉬인(SHEIN)에서 옷 ‘지르기(Haul)’에 빠졌다. 평균 7.99 달러(약 9500원)짜리 옷을 파는 쇼핑몰에서 필요 없는 옷을 산더미처럼 주문하는 것이 유행하면서 이 회사는 '전자상거래 업계의 틱톡'으로 급부상했다. 지난해 매출은 전년보다 두 배 늘어나 100억 달러(약 12조원)를 기록했다.

기존 패스트패션 브랜드는 자신들이 만들어낸 ‘게임의 원칙’을 훨씬 진화한 방식으로 사용하면서, 전혀 눈치를 보지 않는 신흥 강자 등장까지 신경 써야 하는 처지다. 쉬인은 한 철 입고 버리는 옷으로 비판 받아 온 패스트패션을 여러 면에서 뛰어넘는다. 가격은 패스트패션 브랜드보다 약 25% 싸고, 생산 기간은 5~7일로 절반도 안된다. 한 철이 아닌 한 번 입고 버리는 옷으로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더욱 심각하다.

쉬인은 인플루언서를 활용한 마케팅으로 Z세대를 사로잡았다. [유튜브 캡처]

쉬인은 인플루언서를 활용한 마케팅으로 Z세대를 사로잡았다. [유튜브 캡처]

비판이 거세지자 쉬인은 오랜 비밀주의를 깨고 대응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11월 디즈니와 JCP 페니, 휼렛패커드에서 사회공헌 임원을 지낸 아담 윈스턴을 글로벌 ESG 대표로 영입한 것이 가장 화제가 된 변화다. 지속가능패션 컨설턴트이자 작가인 엘리자베스 클라인은 쉬인의 움직임에 대해 “노동력을 착취하고 환경에 대한 기준 없이 초고속으로 성장한 뒤 거대해지면 ’지속가능성 본부‘를 만드는 패스트패션 브랜드의 진화를 계속 봐 왔다”며 “그린워싱(위장된 환경주의)이고 형식주의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친환경 소비자 욕구, 기업 경쟁력 키울 수도"   

패스트패션 기업이 시대에 맞게 적응할 것이라는 낙관도 있다. 연세대학교 의류환경학과 고은주 교수는 “SPA 비즈니스모델은 기업의 경영효율화 측면과 소비자만족의 극대화 측면에서 매우 경쟁력 있는 시스템”이라며 “SPA의 핵심 성공 요인인 속도에 지속가능성을 함께 고려한다면 순환경제와 공유경제의 적합한 지속가능패션의 소비와 생산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승현 국민대 의상디자인학과 교수는 ”패션 산업은 그 어떤 분야보다 소비자의 욕망을 민감하게 포착해 반영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며 “친환경에 대한 소비자의 욕구가 기업에 가장 큰 인센티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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