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핵관’을 위한 변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7면

서승욱 기자 중앙일보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서승욱 정치팀장

서승욱 정치팀장

핵심 관계자, ‘핵관’이 정치권을 한바탕 흔들었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와 이준석 대표 간 갈등과 증오의 키워드로서다. 윤석열의 측근은 윤핵관, 부인 김건희씨와 가까우면 김핵관, 이준석의 핵심 참모는 이핵관, 이런 식이다.

‘핵심 관계자’라는 표현이 자주 회자한 건 이명박(MB)청와대 때였다. 청와대 참모들 중 일부가 “실명 말고 익명으로, 핵심 관계자로 써달라”란 말을 자주 했다. 익명을 허락하면 기자들은 한 걸음 더 들어간 정보를 얻는다. 정보에 목마른 언론과, 실명을 피하고픈 청와대 참모들의 담합 또는 타협의 산물이었다. 언론계의 직업 용어였던 ‘핵관’이 윤·이 두 사람 덕분에 국민적 유행어가 됐다.

야당을 벼랑끝으로 몬 핵관 논란
동서고금 정치사에 늘 존재해와
이해관계 조정할 리더십이 중요

사실 핵관이 없는 정치는 없었다. 1997년 정치부 취재를 시작한 이래 필자는 수많은 핵관들과 소통했다. 이회창 총재 시절의 한나라당, 노무현 후보와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청와대와 MB 청와대, 문재인 대표의 새정치국민연합과 더불어민주당 모두 마찬가지였다. 보스의 뜻을 꿰뚫고 있는 핵관은 기자들에게는 최고의 취재원이다.

1990년대 말엔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 핵관의 연희동 집을 내 집처럼 드나들었다. 그 핵관은 이 총재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새벽에 눈을 뜨면 연희동에서 아침을 먹고 여의도 당사로 출근했다. 늦은 밤에도 연희동을 들른 후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집주인보다 먼저 퇴근해 거실에서 기다린 적도 많다. 사람 좋기로 유명했던 그 핵관의 답변은 대부분 “아니야” 아니면 “몰라”였다. 무엇을 물어도 비슷했다. 그런데 매일 그 집에 가다 보니 “아니야”는 진짜 아니고, “몰라”는 맞다는 뜻이란 걸 알게 됐다. 그것을 안 뒤엔 ‘척하면 척’이었다.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오른쪽)와 이준석 대표가 지난 6일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포옹하고 있다. 이날 윤 후보와 이 대표는 극적으로 화해하며 대선 승리를 다짐했다. 김경록 기자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오른쪽)와 이준석 대표가 지난 6일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포옹하고 있다. 이날 윤 후보와 이 대표는 극적으로 화해하며 대선 승리를 다짐했다. 김경록 기자

지난달 초 이준석 대표가 ‘윤핵관’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며 지방을 떠돌 때였다. 당시 윤 후보와 당 상임고문단의 오찬 간담회가 열렸다. 그때 “오늘 밤이라도 당장 바닷가를 찾아가 이 대표를 끌고 와라” “바다가 모든 개울물을 끌어안듯 전부 제 편으로 만들어라”고 쓴소리를 날렸던 신경식 전 헌정회장이 그 연희동의 집주인이었다.

MB와 박근혜 전 대통령 주변에도 ‘이핵관’ ‘박핵관’이 우글우글했다. 필자는 MB 쪽을 주로 취재했는데, 정두언·박영준·박형준·이동관 등이 당시의 짱짱한 ‘이핵관’들이었다. 2007년 경선 때는 ‘이핵관’이든 ‘박핵관’이든 당시 강재섭 대표와 자주 대립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갈등은 수면 아래에서 해결됐다. MB 집권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이핵관’들과 ‘여당 실세 박근혜’의 관계가 원만할 리 없었다. 하지만 핵관의 존재 자체 때문에 강 대표나 박 전 대통령이 밥상을 엎고 뛰쳐나가지는 않았다.

보스와 정치 중대사를 함께 고민하고 비밀을 나누는 극소수의 참모는 늘 존재할 수밖에 없다.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예외를 찾기 힘든 정치의 본질적 영역이다. 그리고 핵관들의 무거운 입을 열게 하는 건 정치부 기자들의 숙명이다. 그러니 핵관 없는 정치가 있을 리 없다. “자리가 없어졌으니 핵관은 없다”는 취지의 윤 후보 설명을 믿는 이가 별로 없는 것도 같은 이치다.

역사 속의 숱한 핵관들 중 유독 ‘윤핵관’들만 모사꾼들일까. 아니면 이들이 윤 후보를 낙선시키려 일부러 그를 낭떠러지로 내몰고 있을까. 정당 내부엔 다양한 견해와 아이디어가 존재한다. 후보와의 물리적·심리적 거리도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 견해차를 이성적으로 극복하고 좁히는 게 상식적이고 건강한 정당이다. 핵관 문제로 두 번이나 평지풍파를 일으켰던 이 대표의 처신은 관전자 입장에서 그래서 이해 불가다. 2030세대가 그런 이 대표를 무조건 따르리란 기대도 어불성설이다.

그렇다고 이 대표만 비난할 수도 없다. 핵관 논란을 눈덩이처럼 키운 데엔 윤 후보의 책임도 크다. 이 대표와 핵관들의 역할을 부드럽게 조정하는 건 후보의 역할이다. 만약 핵관들의 독주가 있었다면 이에 제동을 거는 것도 보스의 몫이다. 주변의 수만 가지 이해관계를 집단적인 긍정 에너지로 창출해 내는 건 리더십의 기초적 덕목이다. 정치 초보라 그렇다는 건 변명이 안된다. 선거에 이기면 대한민국의 모든 갈등에 답을 내야 하는 대통령직을 맡게 된다.

핵관은 그 자체가 악은 아니다. 오히려 책임을 따지자면 윤 후보의 정치력과 이 대표의 인내심 쪽이 먼저다. 인류와 정치가 태동했을 때부터 있었을 ‘핵관’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씌울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