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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글로브 쥔 오영수 “내게 괜찮은 놈이라 말하고 싶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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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이정재, 정호연과 황동혁 감독(왼쪽부터)이 지난해 11월 29일(현지시간) 열린 고담 어워즈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오징어 게임’은 이정재가 후보로 오른 골든글로브 TV드라마 부문 남우주연상과 작품상 수상은 불발됐다. [사진 AP=연합뉴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이정재, 정호연과 황동혁 감독(왼쪽부터)이 지난해 11월 29일(현지시간) 열린 고담 어워즈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오징어 게임’은 이정재가 후보로 오른 골든글로브 TV드라마 부문 남우주연상과 작품상 수상은 불발됐다. [사진 AP=연합뉴스]

‘오징어 게임’에서 오일남 역을 맡아 ‘깐부 할아버지’란 별명을 얻은 배우 오영수(78)가 한국 배우 최초로 골든글로브 연기상을 수상했다. 10일(한국시간) 열린 제79회 미국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오영수는 TV드라마 부문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그는 올해 세 번째로 골든글로브 남우조연상에 도전하는 ‘석세션’의 키에라 컬킨을 비롯해 ‘더 모닝쇼’의 빌리 크루덥, 마크 듀플라스, ‘테드 라소’의 브렛 골드스타인 등 쟁쟁한 후보들을 제치고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1944년부터 실시된 골든글로브는 미국을 대표하는 시상식이다. 할리우드외신기자협회(Hollywood Foreign Press Association, 이하 HFPA) 회원(87명)이 영화와 TV 프로그램 부문으로 나누어 선정한다. 통상 아카데미, 미국배우조합상(SAG)과 함께 미국 3대 시상식으로 꼽힌다.

골든글로브 한국 배우 최초 수상자인 그는 인터뷰 제안을 단박에 거절했다. “내일 연극이 있다. 그 준비가 나에게 더 중요한 일”이라면서다. 그는 지난 7일부터 서울 대학로 TOM 1관에서 공연하는 연극 ‘라스트 세션’에 출연하고 있다. 그는 모든 에너지를 공연 중인 무대에 쏟고 있었다. 자신의 수상 소식도 기자의 전화를 받고서야 알았다. 그에게 발표가 났다고 전하자 한참 말을 잇지 못하다 “내 생애 처음으로 내가 나한테 ‘괜찮은 놈’이라고 말하고 싶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연극계 명품 배우이자 살아있는 역사

2014년 국립극단 ‘템페스트’에서 주인공 프로스페로 역을 연기하는 배우 오영수. [사진 오영수]

2014년 국립극단 ‘템페스트’에서 주인공 프로스페로 역을 연기하는 배우 오영수. [사진 오영수]

그는 반세기 넘는 세월을 연극배우로 살았다. 1967년 극단 광장에 들어가며 연기를 시작했다. 제대한 뒤 취업을 준비하던 중 극단 단원이었던 친구를 따라 내디딘 발이었다. 1968년 연극 ‘낮 공원 산책’으로 데뷔했고, 이후 극단 성좌·여인·자유 등을 거쳤다. 1987년부터 2010년까지 국립극단의 간판 배우로 활동했다. 지금까지 출연한 연극은 200여 편에 이른다.

대중과의 접점은 많지 않았다.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과 드라마 ‘선덕여왕’(2009), ‘무신’(2012) 등에 출연했지만, 주로 스님 역의 조연에 머물렀다. 그가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은 “한마디를 하더라도 생명력 있는 역할인가”다. 지난달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영화나 TV에 출연하지 않으려는 건 아니었는데, 적당한 제안이 별로 없었다”고 했다.

연극계에서 그는 명품 배우로, 살아 있는 역사로 통했다. 동아연극상 연기상(1979), 백상예술대상 연기상(1994) 등을 수상했다. 호흡과 기력을 중심에 놓는 그의 연기 세계는 정확한 발음과 생생한 표정류의 차원을 뛰어넘는 깊이가 있었다. 멋을 부리지 않는 담백한 연기로 관객을 설득시켰다.

그가 주연을 맡았던 ‘3월의 눈’ 연출가 손진책은 그에 대해 “조미료 안 치는 배우”라고 했다. “뭔가를 만들어내려 하지 않고 거기 놓여지려고 한다. 놓여진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연기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오영수만의 독특한 연기”라며 “자기 신념과 연기 철학이 확실하다”고 말했다.

그가 골든글로브를 거머쥔 것은 의미가 남다르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일단 수상했다는 자체가 갖는 상징적 의미가 굉장히 크다”며 “지난해 ‘오징어 게임’이 일으킨 K콘텐트의 글로벌 열풍이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한국뿐 아니라 다른 비영어권 국가를 위해 장벽을 허물었다는 평가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하철 출퇴근 … 대사 외우며 왕복 3시간

이번 수상은 골든글로브를 둘러싼 ‘인종차별’ 논란에 대해서도 재조명하는 계기가 됐다. 골든글로브는 미국 외 작품에는 유난히 문턱이 높아 ‘벽’으로 인식됐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나 정이삭 감독의 ‘미나리’를 주요 부문에는 올리지 않고 외국어영화상 후보로만 다룬 것이 대표적이다. 지난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은 후보에도 오르지 못하며 인종차별 논란이 확산됐다. 87명의 HFPA 회원 중 흑인 회원이 전무하다는 점도 비판의 대상이었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그간 골든글로브는 백인 위주의 배타적이고 보수적 문화를 상징하는 최후의 보루와도 같았다”며 “오영수 배우의 수상은 골든글로브가 이제 문호를 넓히지 않으면 존립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고민이 반영된 결과로도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징어 게임’에 작품상이나 남우주연상을 주지 않은 것은 아직도 ‘고집’을 완전히 놓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골든글로브까지 손에 쥐었지만 요즘 그의 일상생활은 별 변화가 없다.  매일 아침 평행봉으로 체력을 단련하고, 대중교통을 주로 이용한다. 경기도 성남 집에서 공연장인 서울 대학로까지 왕복 세 시간을 지하철로 이동하며 대사를 외운다. “가장 행복한 순간은 ‘가족들과 함께 식사할 때’, ‘가장 좋아하는 말은 ‘아름답다’”라는 그는 수상 발표 이후 넷플릭스를 통해 공식 소감을 이렇게 전했다. “이제 ‘세계 속의 우리’가 아니고 ‘우리 속의 세계’다. 우리 문화의 향기를 안고, 가족에 대한 사랑을 가슴 깊이 안고, 세계의 여러분에게 감사드린다. 아름다운 삶을 사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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