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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색화가 K-아트 전부 아니다” 다채롭고 서정적인 한국 추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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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이봉상, 미분화시대 이후 2, 1968, 캔버스에 유채, 93x119.4㎝. [사진 학고재]

이봉상, 미분화시대 이후 2, 1968, 캔버스에 유채, 93x119.4㎝. [사진 학고재]

서울 삼청동 학고재갤러리에서 ‘에이도스(eidos)를 찾아서 : 한국 추상화가 7인’전이 7일 개막했다. 참여작가 중 우리가 전시장에서 직접 만날 수 있는 이는 한 명도 없다. 모두 50여 년~10여 년 전 작고했다. 한때 크게 주목받고 명성을 누렸으나, 그들이 떠나자 치열했던 작업의 흔적 또한 빠른 속도로 희미해지고 있다.

20세기 추상화를 이끌었던 이봉상(1916~70), 류경채(1920~95), 강용운(1921~2006), 이상욱(1923~88), 천병근(1928~87), 하인두(1930~89), 이남규(1931~93)의 작품 57점을 한자리에 모았다. 이들의 작품 세계을 통해 한국 추상화의 역사를 되짚고, 잊힌 작가의 미술사적 위상을 재조명하는 기획전이다. 따라서 광주시립미술관·대전시립미술관 소장품 등을 포함해 전체 작품의 30%가량이 비매다. 총괄 기획은 미술전문잡지 ‘아트인컬처’ 대표 김복기 경기대 교수가 맡았다.

이남규, 작품, 1975, 캔버스에 유채, 130x90㎝, 대전시립미술관. [사진 학고재]

이남규, 작품, 1975, 캔버스에 유채, 130x90㎝, 대전시립미술관. [사진 학고재]

전시장에서 만난 김 교수는 “K-아트의 대표 장르로 꼽히는 단색화는 세계 무대에 한국 현대미술의 힘과 저력을 보여준 기적이었다”며 “단색화가 한국 미술의 전부는 아니었다. 우리 미술계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전후 서구에서 유입된 추상회화를 받아들이되 한국적 양식을 고민하고 시도했던 다양한 작가들이 있었다”며 “이번 전시로 서구 추상화와 다른 우리만의 ‘그것’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전시 제목 ‘에이도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존재·사물에 내재하는 ‘본질’을 가리킨다.

전시장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이봉상의 그림이다. 14세에 제8회 조선 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해 주목받은 이봉상은 1937년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홍익대 교수를 역임했다. 수풀, 새, 달 등 한국적 소재를 강렬한 색채, 거친 필치로 담아내던 초기 화면은, 후기에 식물 열매와 세포 같은 형상으로 크게 변화한다.

류경채, 화사한 계절, 1976, 캔버스에 유채, 162x130㎝. [사진 학고재]

류경채, 화사한 계절, 1976, 캔버스에 유채, 162x130㎝. [사진 학고재]

현장에선 1963년 작 ‘나무Ⅰ’과 5년 후에 그린 ‘미분화시대 이후 2’를 눈여겨 비교해 볼 만하다. 갈수록 미시 세계로 파고들며 형태의 본질을 찾아 들어간 작가의 변화를 눈에 띄게 보여준다는 점에서다. 김 교수는 “이봉상은 작고한 1970년 그해 신세계 화랑에서 회고전이 열렸으나, 그 이후 세상에 공개된 적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류경채는 이화여대·서울대 교수를 지냈고 예술원 회장을 역임했다. 또 1995년 작고 후 금관문화훈장을 받았고, 2009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도 열렸다. 그런 류경채 역시 자칫하다간 이대로 잊힐 위기에 처했다. 그는 1960년대 풍부한 색채, 역동적인 붓질로 서정적 추상을, 70년대 모노톤의 화면으로 계절이나 날씨의 미묘한 변화를 담아냈다. 학고재 관계자들은 “전시장에서 포장을 열고 1976년 작 ‘화사한 계절’을 봤을 때 모두 감탄했다”고 전했다.

이상욱, 점, 1973, 캔버스에 유채, 90.5x72.5㎝. [사진 학고재]

이상욱, 점, 1973, 캔버스에 유채, 90.5x72.5㎝. [사진 학고재]

1923년 함경남도 함흥 출신인 이상욱은 88년 작고했다. 국립현대미술관(1992), 일민미술관(1997)에서 회고전이 열렸으나, 그마저 이미 20~30년 전 일이 됐다. 1942년 일본 도쿄 가와바타 화숙에서 수학한 그는 원형 또는 사각형, 단순화된 띠와 점으로 구성한 추상과 토막 난 붓자욱으로 구성한 추상 등을 발표했다. 80년대엔 서체처럼 붓에 속도와 리듬을 불어넣었다.

1931년 대전에서 태어난 이남규에겐 예술작업이 구도(求道) 과정이었다. 공주사범대 국문과,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한 그는 68년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떠나 유리화를 공부했다. 작품을 통해 생명, 자연, 우주 등의 근원적 질서를 표현하고자 했던 그에겐 빛이 중요한 요소였다. 김 교수는 “이남규 회화는 처음엔 그저 순하고 약한 그림으로 보이지만 볼수록 화면에 따뜻한 빛이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고 말했다. 1993년 작고한 이남규 회고전은 가나아트센터(2003), 대전시립미술관(2013)에서 열렸다.

강용운, 예술가, 1957, 목판에 유채, 33.3x24.2㎝. [사진 학고재]

강용운, 예술가, 1957, 목판에 유채, 33.3x24.2㎝. [사진 학고재]

이 밖에 호남 추상미술의 개척자 강용운, 1950년대 후반 대담하게 초현실주의 그림을 그린 천병근, 한국 전통미술과 불교적 세계관을 추상회화로 구현한 하인두의 작품도 함께 볼 수 있다.

김 교수는 “단색화로 촉발된 한국 미술의 관심을 지속해서 이끌어가기 위해 이런 전시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왔다”고 했다. 그는 “한국의 추상회화는 서구 미술의 추상 계보로는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며 “한국 추상회화를 이해하기 위해선 추상이라는 형식에 내용과 정신까지 함께 들춰보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 세대의 추상회화는 ‘서정성’을 빼놓고 논할 수 없다는 뜻이다.

또 “시간이 흐르면서 작가들이 잊히는 데 가속도가 붙는 게 안타까웠다”며 “이런 작품이 더 많이 전시되고, 거래되고, 연구되는 과정을 통해 우리 미술의 정체성을 다져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2월 6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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