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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서 '가슴 쿵쿵' 취객 몰린 男, 가슴에 '시한폭탄' 있었다 [더오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더,오래] 조용수의 코드클리어(88)

어느 밤. 늦은 시간. 한 남자가 응급실에서 난동을 부린다. 막무가내다. 어떻게 왔냐는 의사의 물음은 들은 척도 않고 큰 소리로 짜증만 부린다. 주먹으로 가슴을 쾅쾅거리며 길길이 날뛴다. 안전요원이 제지하려 애써 보지만 도저히 통제 불능. 척 봐도 취객, 누가 봐도 취객. 어지간히 만취하지 않고선 응급실에서 저런 행동을 하지는 못할 터. 상황을 빨리 수습해야 한다. 다른 응급 환자들이 피해를 보기 전에. 전화기를 들고 112를 누른다.

ST 분절 상승 심근경색 환자는 필사의 의지로 십수분 거리에 있는 우리 응급실을 찾았다. 그리고 한 의사의 세심함이 그의 생명을 구했다. [사진 camilo jimenez on Unsplash]

ST 분절 상승 심근경색 환자는 필사의 의지로 십수분 거리에 있는 우리 응급실을 찾았다. 그리고 한 의사의 세심함이 그의 생명을 구했다. [사진 camilo jimenez on Unsplash]

우리는 식탁에 둘러앉아 졸국을 두 달 앞둔 치프 레지던트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4년의 전공의 세월, 짧고도 긴 시간 속에서 그는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환자의 회상을 풀어내고 있었다. 이야기의 초반은 식상했다. 취객의 난동은 응급실에서 툭하면 일어나는 흔한 사건이니까. 하지만 도입부가 끝나고 반전이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순식간에 클라이맥스로 치달았다.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침 한 모금 삼킬 수 없었다.

전공의는 밖으로 끌려나가는 남자에게서 뭔가 쎄한 느낌을 받았다.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그냥 감이었다. 어쩌면 의사의 촉이라고 말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끌려가는 남자를 쫓아가 물었다. 혹시 가슴이 아파서 그러는 것이냐고. 남자는 그 말을 듣고 온몸으로 발버둥 쳤다. 그 발버둥이 긍정인지 부정인지 알 길은 없었지만, 무언가를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는 직감이 들었다. 어쩌면 취객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확신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찝찝함을 남길 수는 없었다. 남자를 침대로 데려와 심전도 검사를 시행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ST분절이 상승한 심근경색 소견이었다. 심근경색 중에서도 가장 급한 케이스다. 재관류 시술이 늦어지면 분 단위로 생존 가능성이 뚝뚝 깎여져 나가는 질환. 이름하여 ST분절 상승 심근경색. 응급실에서 시간을 다투는 초응급 질환 중 하나이다. 남자는 취객이 아니었다. 언제 심장이 멎어 쓰러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존재. 즉 환자였다. 심장을 옥죄어오는 통증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사람들은 취한 것으로 오해했다. 왜냐? 환자는 언어장애가 있었으니까. 의사 표현을 제대로 못 했으니까.

재관류 시술을 마친 후 환자는 안정을 되찾았다. 얼마의 시간이 더 지나자 종이와 펜으로 필담을 나눌 수 있었다. 급작스러운 흉통이 발생했고 이내 죽음의 공포가 찾아들었다고 했다. 가까운 응급실을 찾았으나 문전에서 쫓겨났다. 오해를 받아서. 증상을 차분히 표현하지 못한 탓이다. 두려움과 통증이 그의 사고를 마비시켰기 때문이다. 그 결과 ST 분절 상승 심근경색 환자가 응급실에서 쫓겨나는 상상하기 힘든 사건이 벌어졌다. 선수들끼리는 안다. 그대로면 머지않아 끔찍한 일이 일어날 거라는 걸. 천만다행히도, 그의 심장은 꽤 긴 시간 허혈 손상을 버텨냈다. 그 사이 그는 필사의 의지로 십수분 거리에 있는 우리 응급실을 찾았다. 그리고 운 좋게 한 의사를 만났다. 겨우 쪼렙 전공의에 불과한 의사였지만, 그에게만큼은 세상에 더 없을 진짜 명의를 만난 셈이다.

의사소통에 장애가 있는 사람이 응급실을 홀로 찾을 수 있다. 그런 일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지만, 의사로서 얼마나 인지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사진 Natanael Melchor on Unsplash]

의사소통에 장애가 있는 사람이 응급실을 홀로 찾을 수 있다. 그런 일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지만, 의사로서 얼마나 인지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사진 Natanael Melchor on Unsplash]

치프 레지던트의 얘기를 듣고서 안도와 감탄의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세심함이 한 생명을 구했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그가 아니었다면! 우리 중 누군가가 그때 그 순간에 거기 있었더라면, 그 남자가 환자란 걸 알아볼 수 있었을까? 아니다. 그가 아니면 누구도 못 해냈을 것이다. 응급의학과 의사로서 짬밥이 몇 배나 많은 교수지만, 나 또한 마찬가지다. 일말의 자신감도 들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의사소통에 장애가 있는 사람이 응급실을 홀로 찾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누군가 응급실에서 아무 말 없이 발만 쾅쾅거린다면? 의료진이 묻는 말에 응하지 않고 성질만 부린다면? 당연히 쫓겨나기 십상 아닐까? 하지만 그는 어쩌면 환자일지 모른다. 진짜 급한 환자일지도 모른다. 하필 언어 장애가 있어 단지 표현을 못 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일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우리는 과연 그런 가능성을 얼마나 인지하고 있으며, 얼마나 주의하며 의사로서 응급실에 서 있는지 의문이다.

깨닫는 바가 크다. 졸국을 앞둔 전공의가 떠나기 전에 내게 남기는 선물이 아닌가 싶다. 이 지면을 빌어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 “너의 경험을 항상 마음에 담고 네 몫까지 더 열심히 환자를 볼게. 잘 가라.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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