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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수정의 시선

인권에도 프레임 거는 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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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수정
김수정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울 강남구 국군포로 신고센터에서 만난 박선영 사단법인 물망초 이사장.

서울 강남구 국군포로 신고센터에서 만난 박선영 사단법인 물망초 이사장.

보편가치 '인권' 한국선 진영 갈라치기

15년째 국군포로·탈북자 지원 박선영      

"내 가족이 70년 억류됐다면 참겠나"  

처음 만난 건 2009년 이맘때다. 동국대에서 법학을 가르치다 비례 대표로 제18대 국회에 진출한 박선영 의원은 국군포로송환과 탈북자 인권 이슈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의 눈이 젖었다.  “어떻게 아이에게 이런 짓을 합니까. 안아 줘도 바들바들 떨기만…” 탈북 루트였던 동남아의 한 국가에서 한국인 브로커가 16세 탈북 소녀를 성적으로 유린한 사례를 기자에게 전하면서다.
당시 탈북자는 북핵 다음으로 한국 외교의 에너지를 빨아들이는 이슈였다. 목숨 걸고 탈북한 국군 포로와 북한 주민들을 중국이 강제 북송하는 일이 빈번했다. 그가 서울의 중국 대사관 앞에서 11일간 단식 투쟁한 건 3년 뒤다. 인류 보편적 가치의 핵심인 인권 이슈인 만큼 국제사회 관심 속에 언론들도 성향 불문하고 동참했다. ‘조용한 대중(對中) 외교’를 지향하는 정부를 꾸짖고, 탈북자를 ‘불법 월경자’라며 북송하던 중국을 압박했다.
누적 탈북자 3만5000명인 지금, 탈북자를 ‘배신자’ ‘체제 부적응자’로 묘사하고 남북대화의 방해물로 여기는 분위기가 생겼다. 북한 인권 운동을 하는 탈북자 엘리트사회는 위축됐다. '오지 말고, 왔으면 입 다물고 있으라'는 기류란다. 북한 농업과학원에서 근무한 이민복 북한동포직접돕기운동 대표는 2021년을 보내며 글을 남겼다. “악몽 같은 해가 저물었네요.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북한 동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는 대북전단금지법이 발효됐거든요. 왜 제일 불쌍하냐고요? 21세기 노예니까요. 역사적으로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하는 이런 노예는 없으니까요.”
최근엔 한 탈북자가 군사분계선으로 재월북한 사건이 발생했다. 대공 용의점, 사회 부적응, 생활고가 부각됐다.
“탈북자 대부분 소시민으로 열심히 살아요. 정부의 시선이 더 힘들죠. 북한 인권을 얘기하면 꼴보수·꼰대로 폄훼하는 분위기도요.” 북·중 국경지대 북한 주민의 실상을 전하면서, 탈북자 국내 정착을 돕고 있는 강동완 동아대 교수의 말이다. 한국에서 북한 인권 문제는 정당의 색, 진영을 확연히 가르는 소재가 됐다.
박선영 전 의원을 다시 만났다. 사단법인 물망초를 만들어 탈북자 교육 등 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50여 년 강제노역하다 탈북한 국군 포로를 도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북한을 대리해 국내에서 조선중앙TV등의 저작권료를 받는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이사장 임종석)이 지불하라는 판결을 얻어냈다. 2019년 11월 탈북 어민 2명의 눈을 가리고 북한으로 보낸 서훈 국가안보실장(당시 국정원장),정의용 외교장관(당시 국가안보실장), 정경두 전 국방장관,김연철 전 통일장관을 직권남용과 살인방조 등 혐의로 고발했고, 아사한 탈북 모자 분향소를 광화문에 세웠다. 최근 유엔 북한인권결의안에 국군포로 문제가 담긴 것도 그의 공이 크다. 일본군 위안부, 강제 징용 피해자 이슈에도 목소리를 높여 왔다.
머리색이 희끗희끗해졌을 뿐, 눈빛은 여전했다. “저는 헌법학자로서 헌법의 핵심 가치인 인권 운동을 할 뿐입니다. 인권은 이념도 정치도 아니고 천부인권이잖아요.”
의원 시절 그의 말은 독했다. “영혼을 팔았느냐”“어느 나라 외교관이냐”. 많은 관료가 그를 불편하게 여겼다. “하지만 ‘중국에 왜 큰 소리 못 내냐’는 여론이 있어야 외교도 힘을 받는다. 탈북자 문제를 진정성 있게 파고든 독보적인 존재임은 부인 못 한다.”(전 고위 외교관) “다른 사람들이 다 지치고, 좌절할 때도 집요하게 북한 인권 이슈의 불을 꺼뜨리지 않은 건 대단한 일.”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으로 중국대사관 앞 단식 농성장을 찾았던 천영우 한반도미래포럼이사장의 평가다.
13년 전 16세 탈북 소녀의 멘토가 돼 주겠다고 한 말이 기억나 물었다. “그 아인 미국에서 교육학 석사 마치고 박사 코스 중입니다. 서울 올 땐 구구단도 몰랐고 트라우마도 컸어요. 국내 대학을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고 유학 갔는데 통일 후 북한 교육을 리셋할 때 기여하겠답니다. 매년 한둘씩 유학 보내는 학생 중 통일 후 메르켈(동독 출신)같은 지도자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는 활동 독립성을 위해 한국·미국 등 정부 지원금 없이 회비와 후원금으로만 물망초를 운영하고 있다.
-곧 대선이다. 차기 정부에 바람이 있다면.

보편가치 '인권' 한국선 진영 갈라치기 # 15년째 국군포로, 탈북자 지원해 온 박선영 #"내 가족이 70년 억류됐다면 그냥 있겠나"

“누가 이기든, 인권을 글로벌 스탠다드로 보자고 하고 싶어요. 지금 여기, 침해당하는 사람의 피눈물을 닦아줘야죠. 후보의 아버지가, 아들이, 딸이 나라를 지키러 나섰다가 70년 동안 못 돌아오고 노역에 시달리면 그래도 침묵할까요. 호랑이 담배 피우는 고조선 때 일이 아니잖아요.”
15년 외길 박선영은 말한다. 미얀마의 인권과 북한의 인권이 다르지 않고, 탈북자와 난민, 학생, 장애인, 노동자, 동성애자의 인권이 다르지 않다고. 인권에 프레임을 씌우고, 갈라치기를 하는 운동가는 인권운동가가 아니라고. 눈에 보이는 탄압에 침묵하는 건 죄악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