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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만에 열린 악몽의 바닷길…베테랑 선장은 '노란 부적' 찬다

중앙일보

입력

동트기 전의 선교(船橋)는 인적이 드물었다. 연기를 내뿜는 여객선 굴뚝 아래로 전조등이 갑판을 비췄다. 그 너머로 보이는 검푸른 빛 바다는 방향을 분간키 어렵게 펼쳐져 있었다. 출렁이는 파도와 세찬 바닷바람에 몸은 흔들렸지만, 선체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비욘드 트러스트호 탑승기]

지난달 28일 오전 5시쯤 배는 북위 34도, 동경 125도 부근에 다다랐다. 8년 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해상과 비슷한 위도였다. 인천발 제주행 여객선이 출발할 때 선사 측이 일러준 그 시간, 그 장소다. 근처에서 담배를 피우던 중년 남성에게 이를 알려줬더니 “음…”하는 짧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가족과 함께 여객선에 올랐다는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잊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굳이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을 것이다. 말수가 사라진 그를 보며 ‘괜히 말을 꺼냈나’하는 생각에 기자의 몸도 경직됐다.

‘신뢰 그 이상’을 향해

지난달 21일 새벽 세월호 참사 희생자 유가족은 비욘드 트러스트호에서 희생자를 기리는 짧은 헌화식을 했다. 사진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제공

지난달 21일 새벽 세월호 참사 희생자 유가족은 비욘드 트러스트호에서 희생자를 기리는 짧은 헌화식을 했다. 사진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제공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악몽의 바닷길로 기억되는 여행길은 2021년 12월 10일 다시 열렸다. ‘비욘드 트러스트(Beyond Trust)’ 호가 취항하면서다. 세월호 참사 이후 7년 8개월 만에 인천~제주 뱃길을 잇는 하나뿐인 여객선이다. 선명(船名)에는 “신뢰 그 이상을 주는 운항을 하겠다”는 선사의 의지와 정성이 담겼다고 한다. “모두에게 아픔이었던 항로를 다시 운항하는 것이기에 안전한 운항으로 상처를 조금이나마 보듬겠다”는 게 여객업체의 각오다.

 지난달 21일 새벽 세월호 참사 희생자 유가족은 비욘드 트러스트호에서 희생자를 기리는 짧은 헌화식을 했다. 사진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제공

지난달 21일 새벽 세월호 참사 희생자 유가족은 비욘드 트러스트호에서 희생자를 기리는 짧은 헌화식을 했다. 사진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제공

유족들, 여객선 타고 1분간 헌화

1주일 전엔 짧은 헌화식이 열렸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 유가족과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 위원들이 현장 점검을 위해 재취항한 여객선에 올랐다. 유가족이 희생자를 위해 헌화하고 싶다는 뜻을 사참위를 통해 선사 측에 전달했고 선사가 이를 받아들였다. 이들은 오전 5시쯤 국화꽃 4송이를 흘려보냈다. 꽃에는 ‘잊지 않겠습니다. 행동하겠습니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1분여의 헌화 뒤 유가족들은 말없이 객실로 돌아갔다고 한다.

지난달 27일 오후 7시30분 비욘드 트러스트호가 인천항 여객터미널에서 출항 준비를 마치고 대기하고 있다. 심석용 기자

지난달 27일 오후 7시30분 비욘드 트러스트호가 인천항 여객터미널에서 출항 준비를 마치고 대기하고 있다. 심석용 기자

비욘드 트러스트호는 지름길인 ‘맹골수도’를 피해 운항한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전남 진도군 서거차도와 맹골군도 사이 바닷길이다. 물살이 빠르고 거세다고 알려진 맹골수도를 돌아가면 16㎞(왕복 기준)를 더 운항해야 한다. 운항 시간이 40분 늘어나고 추가비용 200여 만원이 들지만, 안전과 신뢰를 위한 선택이다.

지난달 27일 비욘드 트러스트 호에 탑승한 기자가 묵은 8인실 숙소. 심석용 기자

지난달 27일 비욘드 트러스트 호에 탑승한 기자가 묵은 8인실 숙소. 심석용 기자

세월호의 문제점 제거

선박은 무게중심을 아래에 두는 저중심 설계로 복원성을 높였다. 세월호는 배가 기울어질 때 원래 위치로 되돌아오려는 복원성이 임의 개조로 인해 유지되지 못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화물이 쏠리면서 배가 한쪽으로 기우는 걸 막기 위해 국내 최초로 ‘화물적재 관리시스템’도 장착했다. 화물이 선적기준을 넘어 배에 실리면 여객선 조타실과 선사에 알림이 울린다. 승선객이 30분 이내에 탈출할 수 있도록 하는 해상탈출설비(MES)를 갖췄고 탈출용 구명벌도 정원(854명)보다 많은 1320명을 수용할 수 있게 비치했다. 기자와 여객선 내 8인실 숙소에 함께 묵었던 한 외국인은 “제주도에 배를 처음 타고 가는데, 생각보다 안전한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고 말했다.

비욘드 트러스트 호 내부는 전체 7층 구조다. 1층부터 4층은 화물 및 차량 적재실, 5층부터 7층은 승객 및 승무원 객실로 구성됐다. 지난달 28일 새벽 선박 7층 외부 모습. 심석용 기자

비욘드 트러스트 호 내부는 전체 7층 구조다. 1층부터 4층은 화물 및 차량 적재실, 5층부터 7층은 승객 및 승무원 객실로 구성됐다. 지난달 28일 새벽 선박 7층 외부 모습. 심석용 기자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는 여객선은 2014년 4월 세월호를 운항한 청해진 해운의 정기여객 운송사업 인천∼제주 항로 면허가 취소되면서 멈춰섰다. 두 차례 실패를 거쳐 2019년 하이덱스스토리지가 사업체로 선정됐지만, 선사 공모에서 탈락한 한 업체가 ‘공모 무효확인’ 소송을 내면서 다시 늦어졌다. 소송에서 최종 승소하면서 비욘드 트러스트호가 바다에 뜰 수 있게 됐다.

베테랑 선장 손목의 노란 팔찌 

지난달 11일 오전 인천~제주 항로 여객선 '비욘드 트러스트호'의 조타실에서 고경남 선장이 무전을 하고 있다. 고 선장은 오른 팔에 '세월호 기억 팔찌'를 착용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11일 오전 인천~제주 항로 여객선 '비욘드 트러스트호'의 조타실에서 고경남 선장이 무전을 하고 있다. 고 선장은 오른 팔에 '세월호 기억 팔찌'를 착용하고 있다. 연합뉴스

14시간의 항해는 고경남 선장이 안전을 책임진다. 그는 승선할 때면 꼭 노란색 ‘세월호 기억 팔찌’를 찬다고 했다. 그는 “혹시라도 사고가 있다면 내 뒤로 나오는 사람은 단 1명도 없을 거예요. 이 팔찌는 배에 단 1명도 남겨두지 않겠다는 각오가 담긴 겁니다”라고 했다. 노란 팔찌가 신뢰를 넘어서는 새로운 항해의 부적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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