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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닉슨 베이징에 도착한 날 은밀히 만나 회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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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0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10〉 

중국 방문 첫날 국빈관에서 휴식 중인 미국 대통령 닉슨, 1972년 2월 21일 오후, 베이징. [사진 김명호]

중국 방문 첫날 국빈관에서 휴식 중인 미국 대통령 닉슨, 1972년 2월 21일 오후, 베이징. [사진 김명호]

닉슨의 중국 방문은 많은 일화를 남겼다. 키신저의 보좌관 헤이그는 중국 특유의 습관에 서툴렀다. 상아젓가락 사건으로 중국 경호원들을 웃겼다. 중국은 차관급인 키신저만 우대했다. 국무장관 로저스는 안중에 없었다. 닉슨이 마오쩌둥 만나러 가는 줄도 몰랐다. 미국 경호원과 기자들도 허둥대기는 마찬가지였다. 즐긴 사람도 있었다. 닉슨 방문 4개월 전 중국에 온 에티오피아 황제 하이레 셀라시에는 과한 환대에 기분이 좋았다. 닉슨 접대의 예행연습인 줄 몰랐다.

중, 닉슨 방중 4개월 전부터 예행연습

기자들과 함께한 닉슨. 왼쪽 둘째 줄 첫째가 알렉산더 헤이그. 1972년 2월 26일 오후 항저우(杭州). [사진 김명호]

기자들과 함께한 닉슨. 왼쪽 둘째 줄 첫째가 알렉산더 헤이그. 1972년 2월 26일 오후 항저우(杭州). [사진 김명호]

키신저의 두 번째 방문은 셀라시에 황제가 다녀간 직후였다. 1971년 10월 20일, 보좌관 헤이그와 함께 미 공군1호기로 베이징에 도착했다. 2001년 봄, 전 중국중앙경위국 부국장이 30년 전을 회상했다. “키신저의 2차 방문 목적은 닉슨 대통령 경호와 공동성명 초안에 관한 실무방문이었다. 공항 영접이 썰렁하자 실망한 눈치였다. 인민대회당에서 환영 공연이 열렸다. 참석 인원 500명은 닉슨 환영 공연 예행연습에 동원된 외교부와 중앙경위국, 인민대회당 직원들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미국인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키신저 일행이 베이징을 떠나는 날 미국인들은 비행장에서 밥을 먹었다. 기념으로 젓가락과 찻잔을 들고 갔다. 중국에서 손님이 밥 먹고 젓가락 들고 가는 건 큰 결례였다. 유전되는 얘기를 소개한다. “닉슨 방문 7주 전, 헤이그가 위성통신시설 점검하기 위해 중국에 왔다. 만찬 도중 기이한 행동을 했다. 연회에 사용하는 길쭉한 고급 상아젓가락을 한동안 감상하더니 가죽가방에 쑤셔 넣었다. 중국 측은 보고도 모른 체했다. 예행연습을 겸한 만찬이다 보니 떠날 때 짐 검사가 있었다. 검사원이 헤이그의 가방에서 젓가락을 슬그머니 회수했다.”

헤이그는 상하이에서도 본의 아닌 실수를 했다. 환영 연회에서 혁명위원회 부주임 쉬징셴(徐景賢·서경현)이 헤이그에게 건배를 제의하며 자작시를 낭송했다. 헤이그는 중국 예절을 몰랐다. 일어서지 않고 답사도 안 했다. 넋 나간 사람처럼 젓가락만 바라봤다. 쉬는 예의를 모르는 몰상식한 미국인이라며 화가 치밀었다. 이튿날 미국이 발표한 성명에 “두 개의 중국”이라는, 중국이 제일 싫어하는 용어가 있었다. 헤이그에게 달려가 욕설 퍼부으며 화풀이를 했다.

보고를 받은 마오쩌둥이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에게 지시했다. “미국인들은 사탕을 좋아한다. 헤이그 일행 18명에게 사탕 10근(중국 1근은 500g)씩 선물해라. 헤이그의 사탕 푸대에 예쁜 상아젓가락 한 쌍을 추가해라.” 평소처럼 선문답 같은 말도 잊지 않았다. “좌(左)우 (右)를 잘 살펴야 한다. 좌는 허황된 소리와 거짓말을 잘한다. 우는 기회주의자다. 우리가 바라는 것을 상대가 제안하게 만드는 것이 외교다.”

닉슨의 중국 체류기간은 1972년 2월 21일부터 28일까지 8일간이었다. 미국 측은 중국의 경호 대책에 만족했다. 간부 경호를 책임진 중앙경위국 요원 8000명과 공안부, 베이징 위수사령부가 닉슨 경호에 만전을 기했다. 경호원들에게 주지시켰다. “주동적으로 미국인들에게 접근을 불허한다. 미국 측이 먼저 접근하면 많이 듣고 말은 적게 해라. 미국인과 의논할 일이 발생하면 두 명이 참가하는 것이 원칙이다. 상관의 동의 없이 미국인 방이나 집무실 출입을 엄금한다. 미국 측이 일괄적으로 주는 선물은 감사를 표하고 수령한 후 제출해라. 공적으로 재분배한다. 미국 고관들은 교활하고 노련하다. 사사롭게 선물 주고받지 마라. 돈을 건네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예의를 갖춰 사양해라.” 당시 중국에는 문혁에 놀란 정신병자들이 많았다. 중앙경위국은 공항에서 국빈관까지 도로 양변을 봉쇄했다. 거주자 중 정신병자 136명과 문혁 때 5류분자로지목당한 지주, 부농, 반혁명분자, 악질분자, 우파분자 708명을 경찰서에 격리시켰다. 공항 주변 15개 마을에 살던 5류분자 100명과 정신병자 40명도 철창신세를 피하지 못했다.

닉슨·키신저만 저우 차에 타고 사라져

닉슨을 태운 미 공군1호기는 상하이에서 탑승한 중국인 항법사의 안내를 받으며 베이징으로 향했다. [사진 김명호]

닉슨을 태운 미 공군1호기는 상하이에서 탑승한 중국인 항법사의 안내를 받으며 베이징으로 향했다. [사진 김명호]

중국은 닉슨의 안전에 자신이 있었다. 미국 측이 제안한 무장경호원 36명의 입경(入境)에 동의했다. 조건이 있었다. “입경 후 공개된 장소에서 미국 경호원은 무기를 휴대할 수 없다. 중국 경호원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 미국은 군말 없이 수용했다. 미국이 동원한 비행기는 9대였다. 대통령 전용기와 식별이 불가능한 3대만 남고 비공식 수행원과 기자들이 사용할 차량 200대를 탑재한 6대는 괌으로 갔다가 다시 오도록 조치했다.

닉슨은 마오쩌둥과 회담 일정이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을 출발했다. 중간 기착지 괌에서 기자들과 차 마시며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를 거론했다. “마오 주석과 저우 총리 만나 철학적인 대화를 나누고 싶다. 먼 곳을 바라보는 사람들과 눈앞에 닥친 문제를 토론할 생각은 없다.” 마오는 중국 방문한 외국 국가원수를 떠나기 전날 만나는 것이 관례였다. 괌 발언을 보고받자 머리 빗고 옷을 갈아입었다.

휴식을 취하던 닉슨은 키신저와 함께 저우언라이의 차를 타고 국빈관을 빠져 나갔다. 국무장관 로저스는 예정에 없던 저우와의 긴급 회담이 인민대회당에서 열리는 줄 알았다. 인민대회당 앞에 기자 수백 명이 진을 쳤다. 미국 경호원들은 1시간이 지나도 닉슨과 저우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대통령의 실종에 당황했다. 중국인 붙잡고 물어봐도 웃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70분 후, 백악관 대변인이 기자들 앞에 나타났다. “닉슨 대통령이 마오쩌둥 주석과 회담했다.” 자세한 내용 모르다 보니 그게 다였다.

세계의 언론이 호외를 발행하고 난리를 떨었다. 중국은 뉴스 끝머리에 “미국 대통령 닉슨이 중국을 방문했다”고 짤막하게 내보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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