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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테토, 한국살이 10년 만에 한옥에 맞는 가구 디자인까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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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0호 18면

일보일경…미국인 마크 테토가 한옥에 살면서 배운 것들

한옥 정취에 맞게 꾸민 거실에서 포즈를 취한 마크 테토. 신인섭 기자

한옥 정취에 맞게 꾸민 거실에서 포즈를 취한 마크 테토. 신인섭 기자

일보일경(一步一景).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는 뜻의 사자성어다. 방송인 마크 테토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면서, 지난 7년간의 그의 삶의 변화를 가장 적확하게 표현한 말이기도 하다.

JTBC ‘비정상회담’에 출연하며 방송인으로 유명해진 미국인 마크 테토의 본업은 금융전문가다. 프린스턴대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와튼스쿨에서 MBA를 마친 후 줄곧 월스트리트에서 일했다. 모건스탠리에서 M&A 전문가로 일하다 삼성전자에 스카우트되면서 2010년 처음 한국에 왔다. 현재는 글로벌 투자회사 TCK인베스트먼트의 공동대표이사로 재직중이다. 이처럼 업계에선 유능한 금융투자전문가지만, 대중에게는 ‘한국 문화를 사랑하는 외국인’이라는 부캐(서브 캐릭터)로 더 유명하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어를 잘 하고, 한글로 신문에 칼럼을 쓰고, 한국 미술·공예문화에도 조예가 깊은 미국인. 그는 이 모든 것이 ‘한옥’에서 시작됐다고 했다.

“한국에 와서 처음 5년간은 회사도 집도 강남에 있었어요. 서울 여기저기를 구경했지만 여행 온 외국인 관광객 수준이었죠. 어느 날 지인이 한옥을 주제로 한 사진집을 냈다며 선물로 줬는데 깜짝 놀랐어요. 한국에 이런 집이 있다니, 왜 나는 5년 동안 이런 풍경을 놓치고 살았지. 친구의 소개로 북촌 한옥투어를 하고 마침 비어 있던 지금의 집으로 이사를 했죠.”

한글로 신문 칼럼도 쓰는 미국인

침실 창문과 사진이 연결된 느낌이다. 신인섭 기자

침실 창문과 사진이 연결된 느낌이다. 신인섭 기자

“아파트에서 썼던 가구들을 옮겨 왔는데 한옥에는 안 어울렸어요. 논현동 수입가구 거리에서도 한옥과 어울리는 가구를 찾을 수 없었죠. 갖고 있던 걸 모두 버리고 0에서 시작하기로 했어요. 디자이너는 아니지만 한옥에 어울리는 멋진 공간을 만들고 싶었죠. 조선시대 한옥에 살았던 사람들은 어떤 가구를 썼을까 찾기 시작했어요.”

서재에 둘 선비의 책장, 침실에 둘 반닫이 등 고가구를 하나씩 구하면서 ‘공간 미학’에 대한 그의 욕심은 ‘집에 맞는 가구를 내가 직접 디자인해보자’는 방향으로 좌표를 틀었다. SNS를 뒤져서 자신의 아이디어에 동감해줄 황민혁 목수를 만났다. 이후 두 사람은 나무결이 살아 있는 주방 식탁, 8각 문살에서 영감을 얻은 거실 테이블, 고재로 만든 서재 좌탁 등을 함께 만들었다.

조선시대 책장, 가야시대 토기, 현대미술이 조화를 이룬 서재. 신인섭 기자

조선시대 책장, 가야시대 토기, 현대미술이 조화를 이룬 서재. 신인섭 기자

“뉴욕에 살았다면 하루 날 잡고 이케아나 월마트에 가서 눈에 띄는 걸로 한꺼번에 사왔겠지만 한옥 살림살이는 함부로 준비하고 싶지 않았어요. ‘스토리’와 ‘인연’이 있는 제품들로 의미 있게 공간을 채우고 싶었죠.”

온라인 검색으로 또는 가게에서 마음에 드는 제품을 찾으면 작가에게 전화를 걸어 미팅 약속부터 잡았다. 작가가 어떤 생각과 과정을 거쳐 이 작품을 만들었는지 스토리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국인 공예작가와 한국문화를 잘 모르는 외국인은 이렇게 대화를 나누며 새로운 인연을 엮어갔다.

“8월에 이사해서 추수감사절(미국 명절·매년 11월 넷째 주 목요일)에서야 겨우 친구를 초대할 수 있을 만큼 살림살이를 갖출 수 있었죠. 이날 사진 한 장을 찍어서 인스타그램(이하 인스타)에 올렸는데 의미가 남달랐어요. 요리 잘하는 친구가 해준 칠면조 요리부터 그릇·식탁·창호·집까지 사진 속 모든 것들에 대해 누가·왜·어떤 노력으로 만들었는지 스토리가 머릿속에서 죽 흘러가더라고요. 앞으로도 이 집에는 이야기와 인연을 담아야겠구나 생각했죠.”

현관에 건 20세기 초상화. 신인섭 기자

현관에 건 20세기 초상화. 신인섭 기자

낯선 한옥살이는 마크의 삶의 태도도 바꿔놓았다.

“뉴욕과 강남 아파트에 살 때는 아침에 눈떠서 정신없이 집을 빠져나오는 데 급급했어요. 한옥에 오고 첫 출근을 하는데 마당으로 난 창문을 일일이 닫고 잠그면서 너무 귀찮아서 잘못 왔나 느끼는 순간, 한옥이 말을 걸어왔죠. ‘마크, 4~5분만이라도 집 나가기 전 정신을 맑게 하는 시간을 가져봐.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여유 있게 살아가자’라고.”

한옥에서의 하루하루는 눈길 닿는 곳마다 새롭고, 아름다웠다. 그래서 궁금증도 커졌다.

“옆집 지붕이 참 예뻐서 한옥을 검색해보니 ‘기와’였어요. 고가구를 검색하면서 조선 달항아리를 알았고, 달항아리를 검색하면서는 구본창·강익중 작가의 작품을 알게 됐죠. 창문에 발린 종이가 독특해서 찾아보니 ‘한지’래요. 한지를 검색하면 박서보 작가 이야기가 따라 나왔죠.”

마크 컬렉션 중 19세기 ‘드므’. ‘넓적한 큰 독’이라는 뜻으로 방화수를 담아뒀던 무쇠 기물. 신인섭 기자

마크 컬렉션 중 19세기 ‘드므’. ‘넓적한 큰 독’이라는 뜻으로 방화수를 담아뒀던 무쇠 기물. 신인섭 기자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방법으로 한국 미술과 전통문화를 독학하던 중 잡지 ‘리빙센스’로부터 인터뷰 연재를 제안 받았다. 한 달에 한 명씩 한국 미술·공예 작가를 만나는 내용이다. 공자는 ‘지지자불여호지자, 호지자불여락지자’라고 했다. ‘어떤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는 뜻이다. 온라인으로, 책으로, 전시작품으로만 알았던 작가와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며 공부까지 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마크 테토의 물물기행’ 연재는 벌써 4년 넘게 진행 중이다. 그동안 마크는 자신이 좋아하는 박서보·구본창·배병우·강익중·허명욱 등 한국 미술·공예작가 46명을 만났다.

올해는 스코틀랜드 정통 수제 싱글몰트 위스키 브랜드 ‘발베니’와 함께 ‘메이커스 캠페인’ 프로젝트도 진행했다. 130여 년 동안 수작업으로 위스키를 제조해온 발베니가 전 세계 장인들을 찾아가 ‘만들기(making)’ 예술의 본질적인 가치와 과정을 공유하며 영감을 주고받는 캠페인으로 국내선 2018년부터 진행돼 왔다. 특히 올해는 마크가 진행자이자 해설자로 함께했다. 덕분에 두달에 한 번 꼴로 옻칠작가 정해조, 채상장 서신정, 선자장 김동식, 소목장 소병진, 나주소반 명인 김춘식, 그리고 대발을 만드는 조대용 장인을 만났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대발’이었어요. 전통공예도 관심이 많은데 대나무를 엮어 만드는 발은 처음이었죠. 이렇게 모던하고 멋진 작품이 있다니! 정말 공부는 끝이 없어요.”

박서보·구본창 등 작가 46명 만나

외국인이 한국의 전통공예품인 대발을 아직까지 몰랐다며 이렇게 아쉬워 하고 공부 의욕을 불태울 일인가. 한국인보다 한국 문화를 더 사랑하는 외국인의 열정에 고개가 숙여졌다. 그는 과연 ‘한국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정의할까.

조선시대 활용한 도시락(왼쪽)과 이동식 약장함.

조선시대 활용한 도시락(왼쪽)과 이동식 약장함.

“처음 그 주제로 강연 제안을 받고 고민했었죠. 내가 좋아하는 한옥·백자·고가구·가야토기 등의 공통점은 뭘까. ‘여백의 미, 절제미, 자연미, 단순한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로 정리 되더라고요. 이건 내가 지향하는 삶의 태도에도 적용되는 말이에요.”

화려한 고려청자보다 소박하고 우아한 조선백자를, 나전공예도 반짝임과 문양이 많은 조선후기 작보다 검박한 초기 작을 더 좋아한단다. 개인적으로 수집한 ‘마크 컬렉션’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읽을 수 있었다. 담백하고 진중한 멋. 인터뷰 내내 마크에게서 받은 느낌도 그랬다.

그의 한국 문화 사랑은 계속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등을 후원하면서 외국에 반출됐던 우리 유산을 찾아오는 일에도 열심이다. 요즘은 북촌 한옥마을을 지키고 보존하는 모임을 고민중이다. 그는 인스타그램에서도 한국어와 영어, 두 가지 언어로 글을 쓴다. 한국 문화와 작가들을 전 세계에 알리고 싶어서다.

“일보일경. 지금 저는 한국 문화를 알아가는 나만의 여행을 하는 중이에요. 한 걸음 디딜 때마다 새로운 아름다움을 만나는 이 여행이 너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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