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만물은 흐른다…그러면서 세상을 바꾼다, 때론 혁명적으로 때론 낭만적으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부제에 '유체과학사'라고 적혀 있지만, 기계공학 박사로 자동차와 한국형 발사체의 터보 엔진 개발에 참여한 지은이는 이 책을 혁명과 천문학 이야기로 시작한다.

민태기 지음 『판타 레이』 #과학과 사회의 혁명적 변화사 #17세기부터 현대까지 아울러 #

흔히 ‘혁명’으로 번역되는 레볼루션이 원래는 지동설 제창자 코페르니쿠스가 천체 회전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한 천문학 용어라는 게 지은이의 설명이다. 1688년 영국에서 전제군주 제임스 1세를 몰아내고 그의 딸과 사위인 메리 2세와 윌리엄 1세를 공동 군주로 추대한 정변을 명예혁명으로 부르면서 레볼루션은 대변화를 가리키는 용어로 자리 잡았다.

 지은이는 유체 과학을 씨줄로, 숱한 혁명을 포함한 과학과 사회의 전환기를 날줄로 삼아 17세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과학과 사회의 여정을 통합적으로 살핀다. 이를 위해 17세기 계몽시대 이래 과학기술의 대혁명기를 관통하는 연결고리를 '판타 레이(모든 것은 흐른다)'라는 개념에서 찾으려 시도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말로, 만물은 고정되지 않고 흐르는 유체처럼 시간에 따라 끊임없이 변한다는 생각을 함축한다.

뉴턴의 프린키피아. 당시에는 충격적 내용으로 학계에서 금기시 되기도 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뉴턴의 프린키피아. 당시에는 충격적 내용으로 학계에서 금기시 되기도 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아리스토텔레스는 천상 세계가 제5원소로 불리는 유체 에테르로 이뤄졌다고 여겼다. 천체 움직임을 에테르가 움직이는 유동 현상인 보텍스(소용돌이)에 의한 것으로 봤다. 과학과 철학이 한 몸이었던 계몽시대의 철학자 데카르트도 1644년 출간된 『철학의 원리』에서 행성의 회전운동을 에테르가 일으키는 보텍스로 여겼다. 물을 회전시키면 그 위에 뜬 꽃잎도 함께 돌듯이 행성도 그렇게 운행한다고 봤다.

 하지만 방대한 천체 관측이 바탕이 된 케플러의 행성 운동 법칙에 따르면 태양에서 먼 행성일수록 속도가 느려진다. 뉴턴은 이런 케플러의 법칙을 보텍스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판단해 수학적인 계산을 통해 만유인력설을 제시했다. 근대 과학에 혁명적 사고를 불러온 뉴턴 역학의 탄생이다.

 이를 담은 뉴턴의 저서 『프린키피아』는 당시로선 충격적인 내용이라 학계에서 금기시됐지만 매료된 사람이 많았다. 동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는 이에 빠져 자연사와 천체이론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런던에 망명했던 계몽주의 작가 볼테르가 이를 발견해 프랑스에 소개하면서 '당대의 불온사상'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했다. 자연과학과 인문학, 예술이 한 몸이 돼 새로운 세상을 향해 돌진한 대전환의 시대는 이렇게 열려갔다.

몽골피에 형제의 열기구를 그린 그림. 몽골피에 형제는 1783년 유인 비행에 성공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몽골피에 형제의 열기구를 그린 그림. 몽골피에 형제는 1783년 유인 비행에 성공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디드로와 달랑베르는 그 영향으로 백과사전을 편찬했으며 이는 계몽주의의 확산과 새로운 과학의 시대, 그리고 프랑스 대혁명의 시대로 이어졌다. 이렇게 뉴턴 역학은 구질서를 무너뜨린 이성과 합리를 상징하는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았다. 그 뒤로도 유체의 본질에 대한 논쟁과 연구는 진화를 거듭해 화학과 열역학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1776년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의 출간과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완성, 미국 독립선언서 발표를 거쳐 서양은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을 시작했다. 지은이는 같은 해 벌어진 이 세 사건을 계기로 “비로소 서양이 동양을 넘어서게 됐다”고 지적한다.

1976년 서울의 미8군 연병장에서 열린 미국 독립 2백주년 기념 행사. [중앙포토]

1976년 서울의 미8군 연병장에서 열린 미국 독립 2백주년 기념 행사. [중앙포토]

 유체 과학과 관련한 방대한 미시사는 이 책의 미덕이다. 유체 역학을 근간으로 엮어가는 똑 쏘는 세상 이야기가 줄을 잇는다. 흐르는 액체로서 유동성이 뛰어난 석유가 등장하며 자동차 시대가 빠르게 열리고 미국에서 록펠러가 송유관을 건설하면서 수많은 철도회사가 도산한 이야기는 흥미진진하다. 석유의 유동성을 이용한 가솔린 기관이 불러온 엔진 혁명은 자동차와 항공기의 개발과 확산으로 이어져 현대 세계를 건설한 원동력이 됐다는 지적에 공감이 갈 수밖에 없다.

 변화는 또 다른 변화를 추동한다.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는 송유관 때문에 다니던 철도회사가 파산하자 철강으로 눈을 돌렸다. 고래 기름으로 등불을 밝히던 시절은 등유에 자리를 내줬고, 등유가 이끌던 조명 시장은 에디슨 전구가 나오면서 급속히 재편됐다. 양초 회사인 P&G는 전구가 등장하자 세제‧샴푸‧기저귀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해 거대 다국적 기업으로 성장했다. 국가나 경영 전략에도 영감을 주는 이런 사례들은 현재 우리가 시대를 선도하는지, 뒤처졌는지를 살펴보게 한다. 조선 왕실은 일본보다 빠른 1884년 에디슨과 계약을 맺고 궁궐에 전등을 설치했지만, 국가 운영의 혜안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과학‧기술‧산업‧사회·문화 분야를 망라한 이런 미시사의 향연은 읽는 사람을 빠져들게 한다.

1901년 알베르토 산토스뒤몽이 파리 상공을 비행하는데 사용한 비행선의 모습. 이후 그는 친구인 보석상 루이 카르티에에게 비행 중에 편하게 시간을 볼 수 있는 시계를 부탁했고, 1904년 세계 최초의 손목 시계가 탄생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1901년 알베르토 산토스뒤몽이 파리 상공을 비행하는데 사용한 비행선의 모습. 이후 그는 친구인 보석상 루이 카르티에에게 비행 중에 편하게 시간을 볼 수 있는 시계를 부탁했고, 1904년 세계 최초의 손목 시계가 탄생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지은이는 과학이 결코 과학으로만 세상과 소통하지 않고 끊임없이 사회나 다른 분야와 섞이면서 자신을 재창조하거나 소멸시켰다고 강조한다. 특히 과학자들은 동시대의 음악‧미술‧문화적 소용을 끊임없이 흡수하며 예술가들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음을 지적한다. 결국 과학기술은 우리 사회의 통합적 사고의 산물이라는 지은이의 통찰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