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병철의 셀럽앤카]⑪ “차 인걸 잊어요” 대사의 반전…봉준호 극찬 日영화 속 그 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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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의 남녀 주인공과 사브(SAAB). [사진 트리플픽쳐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의 남녀 주인공과 사브(SAAB). [사진 트리플픽쳐스]

제2의 ‘기생충’으로 눈길을 끌고 있는 일본 영화가 있다. ‘드라이브 마이 카’. 이 영화는 지난해 여름 일본에서 개봉했다. 그런데 올해 미국 아카데미 국제영화상 예비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이 지난 연말 전해지자 다시 관심이 커졌다. 국내서도 영화 팬들의 입소문을 모으며 지난달 23일 상영을 시작했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집 『여자 없는 남자들』에 실린 단편을 토대로 하루키의 다른 소설 『셰에라자드』『기노』 등에서 모티브를 얻어 각본을 쓰고 촬영한 작품이다. 지난해 7월 칸영화제 각본상에 이어 12월 미국 뉴욕·보스턴비평가협회상 작품상을 받았다. 봉준호 감독은 지난해 10월 하마구치 감독을 만난 자리에서 “직업적인 비밀을 캐내고 싶다”며 영화를 극찬했다.

봉준호 감독이 지난해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드라이브 마이 카’의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과 대담하고 있다. [사진 부산국제영화제]

봉준호 감독이 지난해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드라이브 마이 카’의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과 대담하고 있다. [사진 부산국제영화제]

영화는 내내 잔잔하다. 누가 봐도 행복한 부부 가후쿠와 오토. 우연히 아내 오토의 외도를 목격한 가후쿠는 이유를 묻지 못한 채 갑작스럽게 아내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2년 후 히로시마의 연극제에 초청돼 안톤 체호프 희비극 ‘바냐 아저씨’의 연출을 맡게 된 가후쿠는 그곳에서 자신의 전속 운전기사 미사키를 만난다.

말없이 묵묵히 차를 운전하는 미사키와 죽은 아내가 녹음한 테이프를 듣는 가후쿠. 조용한 차 안에서 두 사람은 점점 마음을 연다. 그리고 서로가 과거의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을 알게 된다. 이후 눈 덮인 홋카이도에서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서로의 슬픔을 들여다본다.

“차 안이란 걸 잊을 때도 있어요”라는 대사처럼 조용한 차 안을 주요 배경으로 삼았지만 아이러니하다. 해당 차량이 정숙성보단 고성능 자동차(High Performance Vehicle)로 한때 시대를 풍미했던 스웨덴 사브(SAAB)였기 때문이다. 사브는 항공기 회사에서 출발한 자동차 제작사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사업 다각화 차원에서 차량을 만들기 시작했다.

스웨덴 내 경쟁사 볼보가 ‘안전’을 앞세운 것과 달리 사브는 ‘성능’을 앞세웠다. 항공 기술을 바탕으로 한 터보(Turbo) 엔진이 대표적이다. 터보차저는 엔진에 들어가는 공기의 양을 압축해서 더 불어넣는 장치다. 터보차저를 장착하면 엔진이 상당한 힘을 추가로 얻기 때문에 스포츠카와 대형 차량에 많이 쓰인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여주인공 미사키가 사브(SAAB)를 몰고 있다. 남주인공 가후쿠는 뒷좌석에. [사진 트리플픽쳐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여주인공 미사키가 사브(SAAB)를 몰고 있다. 남주인공 가후쿠는 뒷좌석에. [사진 트리플픽쳐스]

사브는 다른 항공기 기술을 자동차에 장착한 원조이기도 하다. 바로 선루프다. 원래 선루프는 전투기 조종석에서 비상 탈출용으로 만들어졌다. 사브는 1960년대부터 선루프를 차량에 처음 장착했다. 영화에 나오는 붉은색 사브900도 터보차저와 선루프가 모두 달렸다.

고성능 차량으로 명성을 떨쳤지만, 디자인과 가격 경쟁에서 밀리며 내리막을 걷게 된다. 사브는 항공을 뺀 자동차 부문을 1990년 미국 GM에 넘겼다. 브랜드 명맥을 이어오다 2012년 결국 부도가 난다. 2016년 NEVS라는 전기차 회사가 브랜드 사용권과 인력 등을 인수했지만 더는 ‘사브’라는 브랜드로는 생산하지 않고 있다.

스웨덴 사브(SAAB)의 로고. [중앙포토]

스웨덴 사브(SAAB)의 로고. [중앙포토]

사족 하나. 하루키 소설에서 나오는 차량은 노란색이었다. 그러나 촬영에 들어가자마자 노란색 차가 일본 열도의 녹색 풍광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하마구치 감독이 느꼈다. 급하게 차량 담당자에게 다른 차를 구해오라고 했고, 가장 눈에 띄던 붉은색 사브 900을 택했다. 하마구치 감독은 배우들과 가까이하고 싶다며 트렁크에 숨어 연기를 지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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