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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고 너그러운 시골, 그리고 할머니…여백 많은 그림책, 안녕달

중앙일보

입력 2022.01.07 06:00

업데이트 2022.03.02 13:45

한 줄 평 : 한여름, 쩍 갈라 먹는 시원한 수박, 거기서 수영을 한다고?
함께 읽어보면 좋을 안녕달의 다른 그림책
『메리』 어느 평범한 시골 개 메리를 통해 본 정감 넘치는 시골 이야기.
『할머니의 여름휴가』 몸이 아파서 바다에 갈 수 없는 할머니가 손자가 휴가 때 가져온 소라 속으로 들어가 바다로 휴가를 간다. 할머니의 개 이름도 메리!
『안녕』 가족을 잃은 소시지 할아버지가 버려진 강아지와 가족이 되었다. 그런데…
추천 연령 : 3~4세 유아부터 7~8세 어린이까지 모두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림책은 아이부터 어른까지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추천 연령은 서사의 구조나 주제 등을 고려하여 제안하는 참고 사항일 뿐 권장 사항이 아닙니다.)

여기 휠체어 탄 아이가 나오네?

예술의전당에서 열리고 있는 ‘모두의 그림책’ 전시회장에 다녀온 아이가 안녕달 작가의 『수박 수영장』을 펼쳐 들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전시회장 한 켠에 책 속 수박 수영장처럼 만든 볼 풀장에 있었는데요, 거기서 신나게 놀더니 책이 다시 읽고 싶어진 모양입니다. 그렇게 다시 펼친 책에서 전엔 보지 못했던 걸 발견한 겁니다.

한여름 수영복을 입은 아이들 사이에 아무렇지 않게 섞여 수박 수영장을 향해 달려가는 휠체어 탄 아이, 바로 이 장면이 안녕달 작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일 겁니다.

개장한 수박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러 몰려가는 아이들. 왼쪽 아래쪽에 휠체어를 탄 아이가 보인다.

개장한 수박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러 몰려가는 아이들. 왼쪽 아래쪽에 휠체어를 탄 아이가 보인다.

전편에서 소개한 스즈키 노리타케의 그림엔 여백이 많지 않습니다. 커다란 세계 안에 작은 세계를 빽빽하게 채워 넣는 식의 화법을 쓰는 그의 그림은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숨은 그림을 찾는 재미는 있지만, 느긋함은 별로 없습니다. 빽빽한 그림이 만들어 내는 밀도와 속도감 덕에 그림에 바짝 붙게 되죠. 그 점에서 노리타케의 그림책은 도시를 닮았습니다. 오늘 소개할 안녕달 작가의 그림책은 정확히 그 반대 지점에 서 있습니다.

『수박 수영장』은 한여름 잘 익은 수박이 쩍 갈라지면서 개장합니다. 이 수영장은 서울 어느 아파트 놀이터에, 왁자지껄 사람이 빽빽한 워터파크에 있지 않습니다. 멀리 지평선이 보이는 논 한가운데 있죠.

시골 풍경엔 여백이 많습니다. 높은 빌딩이 없으니 저 멀리 지평선이 보이고, 그 지평선 위로는 모두 빈 공간이죠. 『수박 수영장』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탁 트입니다. 저절로 숨을 깊게 들이마시게 되고요. 짧은 호흡이 길어지면 근육이 이완되고,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안녕달 작가의 그림책이 느긋하고 너그러운 건 바로 이 배경 덕분입니다.

『수박 수영장』의 배경은 논이 광할하게 펼쳐진 시골이다. 높은 빌딩이 없는 시골 풍경엔 빈 공간, 여백이 많다.

『수박 수영장』의 배경은 논이 광할하게 펼쳐진 시골이다. 높은 빌딩이 없는 시골 풍경엔 빈 공간, 여백이 많다.

그의 그림책엔 실제로 자연, 그리고 자연을 품은 시골이 많이 등장합니다. 할머니가 마당에서 기르는 개 메리를 주인공으로 한 책 『메리』의 배경도 시골입니다.  눈사람과 아이의 우정을 담은 『눈아이』는 눈 덮인, 그래서 걸릴 것이라곤 없는 하얀 숲이 배경이고요. 『할머니의 여름휴가』는 빽빽한 단독주택촌에서 시작하지만, 이야기 중반 이후엔 시리게 푸르고 넓은 바다가 나옵니다.

안녕달 작가의 그림책을 느긋하고 너그럽게 하는 또 다른 존재는 바로 할머니·할아버지입니다. 『수박 수영장』 에는 수영복을 입은 채 와글와글 수박 수영장으로 달려가는 아이들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할아버지와 수박 껍질로 만든 미끄럼틀에 몸을 던지는 할머니가 나옵니다. 『메리』에는 추석날 그 비싼 한우 갈비를 메리에게 던져주는 할머니가 나오고, 『할머니의 여름휴가』에선 손자가 바다에서 가져온 소라 속 바다로 휴가를 떠나는 할머니가 주인공입니다. 안녕달 작가의 그림책 중엔 드물게 처음부터 끝까지 도시가 배경인 『쓰레기통 요정』에도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나오죠.

『할머니의 여름휴가』는 주인공이 할머니다. 몸이 불편해 바다에 가지 못하는 할머니는 손자가 바다에서 가져온 소라 속으로 들어가 바다로 간다.

『할머니의 여름휴가』는 주인공이 할머니다. 몸이 불편해 바다에 가지 못하는 할머니는 손자가 바다에서 가져온 소라 속으로 들어가 바다로 간다.

안녕달 작가의 책에 유독 할머니·할아버지가 많이 나오는 데엔 이유가 있습니다. 일러스트레이터이자 그림책 작가인 그가 느지막이 일어나 동네에 나오면 온통 할머니·할아버지뿐이었대요. 그도 그럴 것이 젊은이들은 일터에, 아이들은 학교에 갔을 시간이니까요. 자주 만나는 분들이 할머니·할아버지라 그의 그림책에 자주 등장한다는데요, 덕분에 그의 그림책은 시종일관 너그럽습니다. 인생의 황혼에 서 있는 할머니·할아버지는 도시의 밀도 그리고 속도와는 거리가 멀죠.

도시는 효율이 만들어 낸 공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효율을 헤치는 존재들은 잘 보이지 않죠. 하지만 안녕달 작가의 『수박 수영장』 속 세계엔 휠체어를 탄 아이가 이물감 없이 자연스럽게 서 있습니다. 인생은 효율만으로 살아지는 게 아니라고 말하는 듯 말이죠. 2022년도 변화의 속도와 폭은 만만치 않을 겁니다. 지금까지 그랬듯 많은 이들이 불안해할 테고요. 낮잠 자는 게 취미인, 자신을 게으르다고 소개하는 안녕달 작가가 더 소중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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