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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대선이라 생긴 넉달…정권말 '인사 알박기' 시간 됐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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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문재인 정부의 임기를 약 4개월 남겨놓고 이뤄진 춘계 공관장 인사를 두고 뒷말이 무성하다. 특히 특명전권대사는 주재국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해 외교활동을 수행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5월이면 새로 들어설 정부의 인사 영역으로 남겨뒀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의용 외교부 장관이 지난달 29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내신기자 대상 브리핑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

정의용 외교부 장관이 지난달 29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내신기자 대상 브리핑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

외교부는 지난 4일 안일환 전 청와대 경제수석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재 대사로 임명하는 등 춘계 공관장 인사를 발표했다.

법무부 역시 대선을 코앞에 두고 이르면 이달 말 검사장 인사를 할 수 있다고 예고했다. 그간 정부 말 검사장 승진 인사는 거의 없었다. 정부 교체를 앞두고 친(親)정부 성향 검사들이 대거 승진하는 ‘보은(報恩) 인사’ 성격이 될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과거 대선이 12월에 치러질 때는 각 부처의 연말․연초 고위직 인사도 자연스럽게 중단되곤 했다. 이미 새 대통령이 정해진 뒤였기 때문이다. 2월이면 새 정부가 출범하는데, 물러나는 정부가 새롭게 고위직 인사를 내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대선은 3월 9일, 새 정부 출범은 5월 10일이라 상황이 다르다. 새로워진 ‘정부 교체 시간표’를 노려 물러나는 정부가 연말연초에 ‘내 뜻 인사’를 하고 갈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생긴 셈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재 대사로 임명된 안일환 전 청와대 경제수석. 뉴스1.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재 대사로 임명된 안일환 전 청와대 경제수석. 뉴스1.

게다가 외교부는 오히려 공관장 인사 시기를 앞당겼다. ‘춘계 인사’가 ‘연초 인사’가 됐다.

정부의 공관장 인사는 춘계와 추계로 나눠 이뤄지는데, 최근 몇 년 동안에는 공관장 검증 과정이 까다로워지며 인사 절차가 다소 늦어지는 경향이 짙었다. 지난해에는 춘계 공관장 인사 내정이 완료된 시점이 3월 말이었고, 문 대통령이 신임 대사들에게 신임장을 수여한 건 5월 말 쯤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두 달 이상 앞선 1월 초에 내정이 마무리된 데 대해 외교부 당국자는 “몇 개월 째 공석인 자리가 있었고, 가급적 공백을 단축하기 위해 가급적 빨리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기타 여러 일정도 고려했다”면서다.

공관장 인사는 외교부 본부의 고위공무원단 인사와도 연동되기 때문에 절차가 지나치게 늦어질 경우 인사 공백이나 적체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공백 인원 자체가 많지 않은 데다 공관장이 공석이어도 공관 차석이 임무를 대행하는 대사대리 체제가 가능하다.

결국 문 정부 임기 내에 보은성 인사를 마무리하기 위해 이번 인사를 서둘렀다는 관측이 외교가에는 파다하다. 대사에 대한 주재국의 아그레망(임명 동의) 절차에는 통상 2개월 안팎 소요된다. 역산했을 때 1월 초에는 내정이 마무리돼야 3월 대선에서 차기 대통령이 확정되기 전에 문 대통령이 신임장 수여까지 마무리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5일 강원 고성군 제진역에서 열린 동해선 강릉~제진 철도건설 착공식에서 발언하는 모습. 뉴스1.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5일 강원 고성군 제진역에서 열린 동해선 강릉~제진 철도건설 착공식에서 발언하는 모습. 뉴스1.

하지만 이는 사실상 차기 정부에 대한 인사권 침해로 비칠 소지가 크다.

미국에서도 물러나는 정부와 새로 들어서는 정부 간의 인사권 문제는 항상 예민한 주제였다. 이와 관련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핵심 참모였던 테드 소렌슨은 “대통령은 오직 한 명”이라는 원칙에 따라 대통령 당선자가 현직 대통령의 권한을 침해해선 안된다는 ‘불간섭’ 원칙을 지적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 가지 예외는 인사”라며 “당선자가 원한다면 새 직책 임명이나 보직 변경에 대한 중단을 요청할 수 있다”고 봤다.

실제 미국은 정부 교체 직전에는 공관장 인사를 자제하는 경향이다. 주요국이라 해도 공백이 길어지면 길어지는 대로 대사대리가 대행 체제를 유지한다. 주한 미국 대사도 지난해 1월 이후 공석이다.

외교부 1차관과 국가안보실 차장을 지낸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조태용 국민의힘 의원“대선과 정부 교체가 임박한 시점에서 공관장 인사를 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며 “사실상의 ‘알박기’성 인사”라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 OECD 대표부를 이끌게 된 안일환 신임 대사의 경우 기획재정부 2차관을 거쳐 직전에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냈다. 외교부 당국자는 “안 신임 대사는 재무 및 예산 행정 분야의 전문가로 우리 국익 증진을 위해 많은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요소수 대란 당시 청와대에서 태스크포스(TF) 팀장을 맡았다가 지난해 11월 돌연 교체됐다. 문책성 경질이라는 분석에 청와대는 “건강상 문제”였다며 극구 부인했다.

하지만 이번에 OECD 대사로 임명된 것은 경제수석 임무를 수행하지 못할 정도로 심각했던 건강 문제가 불과 두 달 만에 프랑스 파리에 있는 OECD 본부에서 근무할 정도로 회복됐다는뜻이 된다. 외교부 당국자는 “본인이 지금은 건강이 상당히 호전돼 대사직을 수락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통상 공관장의 임기는 3년 정도이지만, 정부 교체기에는 예외다. 특히 주요국이나 주요기구, 또 직업 외교관이 아니라 특임 공관장인 경우에는 신정부가 들어서면 임기와 관계없이 교체되곤 한다. 안일환 대사가 바로 특임 공관장이다.

결국 짧으면 임기가 몇 개월에 불과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대사 인사를 내는 것은 주재국을 배려하지 않는 결례도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번 인사 뒤 “대사는 하루를 해도 대사”라는 속설이 외교가에서 다시 회자되는 이유다. 단기간의 공관장 역임도 경력에는 고위 공직을 수행한 기록으로 남기 때문이다.

한 전직 외교관은 “정말 필요가 커서 했다기보다는 특정인물을 배려하기 위해 다른 자리들을 끼워 넣어서 한 인사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정부가 교체되면 곧 바뀔 자리를 버젓이 현정부의 보은 인사로 채우는 건 상대국에 대한 큰 외교적 결례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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