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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장애인 일자리 정책, 복지가 아닌 인권 문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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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조종란 서울여대 석좌교수·전 장애인고용공단 이사장

조종란 서울여대 석좌교수·전 장애인고용공단 이사장

서울 이룸센터에서 지난해 11월 장애인 일자리 관련 토론회가 개최됐다. 주제는 ‘세상을 바꾸는 노동을 합니다-재활을 넘어, 권리생산 주체로’였다. 토론의 핵심은 “생산성 중심의 노동 담론에서 벗어나 장애인의 권리 생산에 초점을 맞춘 권리 중심 공공일자리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여의도 토론회장을 지나던 분들이 장애인의 노동, 생산성, 권리 중심 일자리라는 단어를 보고 생경한 마음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리지 않았을까 싶다. 장애인과 노동과 생산성이라는 단어가 쉽게 연결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장애인 고용정책은 장애인도 생산 가능한 인력으로 손색이 없다는 전제에서 정책의 합리성과 타당성을 설명해 왔다.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더 나아가 기업이 원하는 생산성을 낼 수 없는 장애인이라도 일자리를 제공해야 하며, 그 주체는 국가여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자리였다.

지금까진 소득·재활 차원서 접근

중증장애인도 일할 권리 누려야

즉 우리나라 헌법에서 정의하듯이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는 누구나 일을 해야 하고 장애인 또한 예외가 될 수 없으며, 이제는 생산성 여부와 관계없이 국가가 책임지고 장애인에게 노동할 기회를 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장애인을 위한 노동권’을 보장하라는 주장이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권리 중심의 일자리’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장애인들에게 선언적으로 노동권을 보장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 당사자가 직접 ‘권리를 생산하는 주체’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한 기본권 보장 차원에서 중증장애인이 일할 기회를 제공해야 하는 것을 말한다. 이때 장애인 일자리는 기존 노동시장의 일자리 범위를 뛰어넘어 다양한 활동까지도 일로, 노동으로 인정해 줘야 한다. 다소 획기적인 제안일 수 있겠지만, 장애인 진보 단체들이 오래전부터 논의하고 펼쳐온 주장들이다. 중증장애인의 노동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새로운 도전의 시작이 시대 흐름이다.

노동권은 노동의 능력과 의욕을 지닌 사람이 사회적으로 노동할 기회 보장을 요구하는 권리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장애인 일자리 관련 토론회를 보니 지금까지 장애인의 인권과 노동권 보장을 위해 국가가 노력하고 있다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철학과 관점을 갖고 정책을 추진해 왔는지, 장애인 당사자의 의견과 입장을 얼마나 반영하고 고려했는지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중증장애인에게 노동은 생계 수단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하는 필수적인 과정이 아니라 인간 권리를 실현할 수 있는 활동이어야 한다. 물론 이러한 노동에 대한 관점의 변화는 중증장애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사회 전체적으로 다시 고려해봐야 할 문제인데, 그동안 노동시장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돼온 중증장애인을 위한 노동 문제부터 시작하는 것이 출발점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 중증장애인 고용 정책의 근간이 되는 장애인 고용의무제가 시행된 지 30년이 지났다. 그동안 정책의 성과는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미래의 장애인 일자리 정책은 장애인의 노동할 권리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철학을 바탕으로 전환적 시각에서 출발해야 한다. 정책을 수립하기 위한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중증장애인 노동의 가치와 개념이 정책으로 전환돼 현실적으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장애인 당사자는 물론 관련 전문가와 활동가들이 방향 전환에 대한 필요성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공감하는 과정이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 물론 정책 결정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공급자 중심이 아닌 장애인 당사자의 목소리가 반영돼야 한다. 오는 5월에 새로운 정부가 탄생할 것이다. 더는 미룰 수 없는 중증장애인의 노동권이 제대로 실현되는 방향으로 일자리 정책이 진화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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