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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건져올린 삶의 현장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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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위성욱 기자 중앙일보 부산총국장
위성욱 부산총국장

위성욱 부산총국장

“새우는 죽어서야 등을 굽히고/ 시장 사람들은 죽어서야 등을 편다.” 경남 창원에 사는 성윤석 시인이 최근 발간한 첫 산문집 『당신은 나로부터 떠난 그곳에 잘 도착했을까』(샘앤파커스)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그는 1990년 한국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한 뒤 그동안 『멍게』(문학과지성사)와 『밤의 화학식』(문예중앙) 등 시집 5권을 낸 중견 시인이다. 하지만 그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기자와 공무원이라는 안정적인 직장을 버리고 수도권으로 올라가 벤처기업을 하다 망한 뒤 묘지관리인으로 살았다. 그런 뒤 마산어시장으로 내려와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을 하는 ‘잡부’로 3년간 살기도 했다. 그런 생의 밑바닥을 전전하며 건져 올린 경험들은 반짝이는 경구(警句)가 돼 4권의 시집과 한 권의 산문집으로 돌아왔다.

당신은 나로부터 떠난 그곳에 잘 도착했을까

당신은 나로부터 떠난 그곳에 잘 도착했을까

성 시인이 뭍으로 올라온 물고기, 그들과 생을 함께 하는 어시장 사람들의 삶을 건져 올렸다면 부산에서는 바닷속에서 삶을 건져내고 있는 해녀들의 이야기가 책으로 출간됐다. 김여나 동화작가와 기장군보 편집장인 황현일 사진작가가 부산 기장군 1세대 해녀들의 자서전을 엮은 『나는 해녀다』(발행 기장군·비매품)가 그 책이다.

이 책에는 1920~1930년대에 출생해 이제는 80~90대 할머니가 된 기장 1세대 해녀 6명의 억척같은 삶이 녹아 있다. 김 작가는 직접 해녀를 만나 들은 이야기를 동화처럼 풀어 써 내려 갔고, 황 편집장은 퇴역한 1세대 해녀들과 현직 해녀의 모습을 생생한 사진으로 담았다.

나는 해녀다

나는 해녀다

해녀들의 자서전이 나오게 된 건 김 작가가 2019년 기장 해녀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은 것이 계기가 됐다. 그 뒤 김정자(73) 기장 해녀회장을 만난 뒤 해녀의 뿌리부터 취재를 시작했다. 해녀에서 은퇴한 94살 1세대 해녀 김복례 할머니 등을 만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기장 해녀들의 삶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황 편집장은 2년 넘게 휴일을 잊은 채 바다와 해녀 집을 오가며 카메라 셔터를 눌러 그들의 삶을 기록했다. 그렇게 두 작가의 끈질긴 집념으로 발굴한 18개 기장 갯마을 해녀 이야기는 기장 군보에 연재됐고, 해녀 자서전의 형태로 출간될 수 있었다.

바닷속처럼 생의 밑바닥은 어둡다. 그렇지만 어시장이든 바닷속이든 거기에는 고단하지만, 우리가 몰랐던 값진 삶이 숨겨져 있다. 생의 밑바닥으로 내려간 자만이 건질 수 있는 살아 있는 깨달음 같은 것이다. 성 시인이 산문집에 나오는 “비굴은 반드시 젖는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울게 되어 있다./(…)/바람이 불어 비굴이 잘 마르고 뒤집어질 때 떡하니, 굴비”가 된다는 문장 같은 것이다. 지역 바다에서 활어처럼 작가들의 손에서 미끄러지듯 빠져나온 싱싱한 책 두 권이 새해에 반가운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