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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맞짱’뜨는 유일한 나라 '리투아니아'…세계 외교가가 놀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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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는 147배 넓고, 인구는 519배, GDP는 263배 많은 나라에 사사건건 맞서면 어떻게 될까. 이런 대담한 행동으로 세계 외교가를 깜짝 놀라게 한 나라가 있다. 유럽 변방의 소국 '리투아니아'다.

지난해 중국과 리투아니아 관계는 악화 일로를 걸었다. 중국은 지난해 11월 리투아니아와의 외교 관계를 ‘대사관’급에서 ‘대리대사’급으로 낮췄다. 중국이 유럽 국가와 외교 관계를 강등한 건 1981년 이후 40년 만이다. 리투아니아에 대한 경제 보복에도 나섰다. 리투아니아행 화물 열차 운행을 중단했고, 수입품 통과도 거부했다.

굳게 문을 걸어 잠근 중국 베이징 주재 리투아니아 대사관 건물. 중국-리투아니아 양국 관계가 악화하면서 지난달 15일 리투아니아는 대사와 가족을 모두 철수시켰다고 밝혔다. AP=연합뉴스

굳게 문을 걸어 잠근 중국 베이징 주재 리투아니아 대사관 건물. 중국-리투아니아 양국 관계가 악화하면서 지난달 15일 리투아니아는 대사와 가족을 모두 철수시켰다고 밝혔다. AP=연합뉴스

자오리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양국 관계는 매우 심각한 상황으로 리투아니아에 전적인 책임 있다. 스스로 원인을 찾아서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으라”고 일갈했다. 지난해 11월 추이훙젠 중국국제문제연구원 유럽연구소장은 리투아니아를 가리켜 “쥐똥 하나가 요리를 다 망치게 놔두지 않겠다”고 비하했다.

란드스베르기스 리투아니아 외무장관은 지난해 11월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중국 문제와 관련해 “리투아니아 사태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은 경제적 압박을 받는다해도 한 국가는 외교적 결정을 독립적으로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협박을 당해도, 중국 언론의 질타를 받아도 견뎌야 한다”고 말했다. AFP=연합뉴스

란드스베르기스 리투아니아 외무장관은 지난해 11월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중국 문제와 관련해 “리투아니아 사태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은 경제적 압박을 받는다해도 한 국가는 외교적 결정을 독립적으로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협박을 당해도, 중국 언론의 질타를 받아도 견뎌야 한다”고 말했다. AFP=연합뉴스

리투아니아도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가브리엘루스 란드스베르기스 리투아니아 외무장관은 지난해 11월 “중국의 권력과 경제력이 크다는 걸 안다. 중국은 정치적 요구가 있을 때마다 힘을 휘두르고 모두 거기 동조한다. 이건 분명 우리가 생각한 세상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발트해의 작은 나라가 중국과 맞서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이렇게 강하게 대립각을 세워도 괜찮은 걸까.

중국의 ‘아픈 손가락’을 깨물다

지난해 7월 대만과 리투아니아는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에 주 리투아니아 대만 대표부를 설치한다고 발표했다. 중국은 대만을 중국의 일부로 보며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중국은 즉각 “베이징 주재 리투아니아 대사는 철수하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리투아니아는 중국의 항의에 아랑곳없이 지난해 11월 18일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에 대만 대표부를 정식 출범시켰다. 여기서 놀라운 건, 대표부 현판에 ‘대만’이라는 이름을 박았다는 점이다.

지난해 11월 문을 연 리투아니아 주재 대만 대표부 현판. ‘대만(Taiwan)’이라는 국명이 선명하다. 이를 계기로 중국은 연이어 강도 높은 경제적 보복에 나섰다. AFP=연합뉴스

지난해 11월 문을 연 리투아니아 주재 대만 대표부 현판. ‘대만(Taiwan)’이라는 국명이 선명하다. 이를 계기로 중국은 연이어 강도 높은 경제적 보복에 나섰다. AFP=연합뉴스

이전에도 유럽 국가들에는 대만의 대사관 기능을 하는 대표부가 존재했다. 하지만 정식 명칭은 ‘대만 대표부’가 아닌 ‘타이베이 대표부’를 사용했다.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고려해 대만이라는 국명 대신 타이베이라는 수도명을 썼다. 이런 상황에서 리투아니아는 ‘대만’이라는 국명을 직접 사용한 것이다.

리투아니아는 한 발 더 나갔다. 대만 대표부를 설치한 열흘 뒤, 리투아니아 국회의원들이 이웃 나라인 라트비아·에스토니아 의원을 모아 대만을 방문했다. 이들은 차이잉원 대만 총통을 만나 국가 간 협력을 약속했다.

지난해 11월 29일 마타스 말데이키스 리투아니아 국회의원이 차이잉원 대만 총통을 만나 선물을 건네고 있다. 중국의 위협이 거세지는 가운데 양국은 직접 만나 경제적·정치적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EPA=연합뉴스

지난해 11월 29일 마타스 말데이키스 리투아니아 국회의원이 차이잉원 대만 총통을 만나 선물을 건네고 있다. 중국의 위협이 거세지는 가운데 양국은 직접 만나 경제적·정치적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EPA=연합뉴스

지난해 내내 리투아니아는 중국을 자극하는 장면을 여럿 만들어냈다. 지난해 5월 리투아니아 국회는 중국 신장위구르 자치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집단 학살’로 규정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같은 달 중국과 중유럽·동유럽 국가가 모여 만든 ‘17+1 경제협력체’에서 탈퇴했다. 9월엔 마르기리스 아부케비시우스 리투아니아 국방부 차관이 직접 “중국 스마트폰에 ‘티베트 자유’, ‘대만 독립’을 치면 검열된다. 중국 폰은 사지 말고, 샀다면 최대한 빨리 버려라”라고 리투아니아 시민들에게 촉구했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은 지난해 9월 란드스베르기스 리투아니아 외무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우리는 중국 등의 경제적 압력에 공동 대처해 나가겠다”며 든든한 지원을 약속했다. AFP=연합뉴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은 지난해 9월 란드스베르기스 리투아니아 외무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우리는 중국 등의 경제적 압력에 공동 대처해 나가겠다”며 든든한 지원을 약속했다. AFP=연합뉴스

언어 금지령에도 '민족혼' 지킨 리투아니아

리투아니아가 중국에 강경한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리투아니아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이해해야 한다. 리투아니아 근대사 대부분은 러시아 제국과 소련 강점기로 점철돼 있다. 15세기 신성로마제국보다 더 큰 영토로 유럽 최대 면적을 자랑했던 리투아니아는 1795년 러시아 제국에 점령당했다. 러시아는 리투아니아를 ‘북서 크라이(Северо-Западный край)’라는 행정구역으로 대체했다.

'리투아니아어의 사용은 엄격히 금지된다'고 써 있는 러시아어 표지.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을 떠올리게 한다. 사진 지그마스 진케비시우스의 저서 『리투아니아어의 역사』

'리투아니아어의 사용은 엄격히 금지된다'고 써 있는 러시아어 표지.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을 떠올리게 한다. 사진 지그마스 진케비시우스의 저서 『리투아니아어의 역사』

러시아는 1865년 리투아니아에 강력한 문화 말살 정책을 폈다. 2년 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청년들의 무장봉기에 대한 징벌적 대응이었다. 당시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청년들은 20년이나 복역해야 하는 러시아 제국 징병제를 반대하며 무장봉기에 나섰다. 하지만 외세의 도움을 받지 못해 봉기는 진압됐고, 대부분 처형당하거나 시베리아로 유배됐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는 이후 리투아니아어 사용과 교육을 금지했다. 오직 러시아어와 키릴 문자만 쓰도록 했다. 러시아와 리투아니아는 인접 국가이지만 언어는 한국어와 일본어만큼이나 다르다.

리투아니아인들은 러시아 압박에 굴하지 않고 서쪽 접경인 동프로이센에 비밀 조직을 만들었다. 옆 나라에서 리투아니아어 책을 찍어서 국경을 넘어 도시 곳곳에 실어날랐다. 사람들끼리 네트워크를 만들어 책을 돌렸다. 지하 교육시설과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리투아니아 언어와 역사를 가르쳤다.

리투아니아어 금지령은 40년이나 지속했다. 하지만 리투아니아 말과 문화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번성했다. 그 기간 암암리에 출판한 리투아니아어 출판물은 350만부가 넘었다. 초등 교재 50만권, 일반 서적 30만권, 신문 7만5000부가 발행됐다. 이 때문에 리투아니아는 반세기 가까이 언어를 빼앗겼지만 1905년 문해율이 50%를 넘겼다.

1939년 독소불가침 조약 체결을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한 독일 외상 리벤트로프를 맞이하는 소련 외상 몰로토프. 애초 계약에선 리투아니아를 독일에 넘기는 조건이었으나 1940년 후속 계약으로 리투아니아는 소련에 병합된다. 리투아니아는 이후 50년 동안 식민지의 설움을 겪었다. 중앙포토

1939년 독소불가침 조약 체결을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한 독일 외상 리벤트로프를 맞이하는 소련 외상 몰로토프. 애초 계약에선 리투아니아를 독일에 넘기는 조건이었으나 1940년 후속 계약으로 리투아니아는 소련에 병합된다. 리투아니아는 이후 50년 동안 식민지의 설움을 겪었다. 중앙포토

1917년 러시아 혁명이 터지고 제국이 무너지면서 이듬해 리투아니아도 해방된다. 하지만 독립은 오래가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독소불가침 조약)과 후속 계약의 결과로 리투아니아는 1940년 소련에 불법 병합된다. 이듬해 나치 독일이 침공하면서 다시 리투아니아는 식민지로 전락했다. 이 기간 리투아니아에서 유대인 20만명이 학살됐다.

리투아니아 독립운동 ‘발트의 길’

1944년 소련이 리투아니아를 차지한 뒤 피의 숙청이 시작됐다. 소련은 나치 잔당을 처리한다는 명분으로 3만 가구를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시켰고, 12만명을 추방했다. 리투아니아인 5만명이 숲속에서 무장투쟁을 벌였지만 소련군을 이길 순 없었다. 리투아니아는 소련의 압제 속에 40년이 넘는 세월을 견뎌야 했다.

1989년 발트 3국 국민들은 도로에 늘어서서 각국 수도를 잇는 600km가 넘는 거대한 인간띠 '발트의 길'을 만들었다. 세계 독립운동사에서도 손꼽히는 명장면으로 기억된다. 사진 위키피디아

1989년 발트 3국 국민들은 도로에 늘어서서 각국 수도를 잇는 600km가 넘는 거대한 인간띠 '발트의 길'을 만들었다. 세계 독립운동사에서도 손꼽히는 명장면으로 기억된다. 사진 위키피디아

1989년 소련 붕괴를 몇 년 앞두고 리투아니아 국민은 같은 처지인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국민과 함께, 역사에 길이 남는 작품 하나를 만든다. 소련 지배를 낳게 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50주년 행사를 겨냥해, 3개국 국민은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에서 라트비아 수도 리가를 거쳐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까지 이어지는 675.5㎞ 길이의 인간 띠를 만들었다. 3국 인구 3분의 1이 동원된 이 캠페인은 ‘발트의 길’이라고 불린다. 수많은 사람이 도로에 줄지어 서서 손을 맞잡고 독립을 외쳤다. 이 사건은 전 세계 언론에 크게 보도됐다.

이를 계기로 1990년 독립을 선언했고, 1991년 9월 마침내 독립을 쟁취했다. 이런 역사 때문에 리투아니아엔 반러시아 민족주의 정서가 강하다. 구소련 국가 중 러시아인 비율이 6%밖에 안 된다. 러시아어를 공용어로 쓰는 구소련 국가가 많지만, 리투아니아는 공식 언어로 리투아니아어만 고집한다.

그라즈비다스 야수티스 리투아니아 빌뉴스대 국제관계학 박사는 “1944년 이후 소련 치하에서 수많은 리투아니아인이 강제 추방당했다. 최소 13만명이 노동교화소, 굴라크(정치범수용소), 시베리아와 같은 변방으로 보내졌다. 많은 사람이 죽었다. 소련은 또 1991년 1월 ‘피의 일요일’이라고 불리는 사건을 일으켜 리투아니아 민간인을 공격하기도 했다. 리투아니아인에겐 거대한 트라우마"라고 말했다.

1991년 3월 국가 재건을 선포하는 리투아니아 국가최고회의 위원들. 사진 리투아니아 국립중앙아카이브

1991년 3월 국가 재건을 선포하는 리투아니아 국가최고회의 위원들. 사진 리투아니아 국립중앙아카이브

독립 뒤 리투아니아는 러시아가 주도한 독립국가연합 참여를 거절하고 바로 UN에 가입했다. 1994년 구소련 국가 최초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 신청을 했다. 반소련 군사동맹이나 다름없는 NATO 가입을 서두를 정도로 독립에 대한 열의가 충만했다. 리투아니아는 2004년 NATO와 EU에 정식으로 가입 승인됐다.

반러시아 정서 때문에 러시아와 벨라루스의 반체제 인사들이 망명하는 일도 잦다. 민주주의의 ‘소도’인 셈이다. 2018년엔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을 비판한 언론인 예브게니 티토프가 망명했다. 지난해엔 벨라루스 반체제 언론인 라만 프라타세비치가 그리스에서 리투아니아로 향하던 비행기를 타고 가다 벨라루스 당국에 납치돼 체포되는 일도 있었다.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리투아니아를 “민주주의의 성소”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란드스베르기스 외무부 장관은 자국 역사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지난해 11월 리투아니아에서 열린 ‘미래의 민주주의를 위한 포럼’에서 “우리는 점령 당한 국민이 무엇을 겪는지를 너무 잘 이해하고 기억하는 나라다. 자유를 얻는 투쟁과 민주주의의 폐허 속에서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것이 뭔지 안다”고 했다. 이 발언은 중국을 겨냥한 것으로 해석된다.

반중국 정서를 촉발한 ‘홍콩 민주화 시위’

리투아니아 특유의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반감과 함께, 2019년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도 리투아니아를 중국 반대편에 서게 했다.

사실 그전까지 리투아니아와 중국 관계는 좋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나쁘지도 않았다. 리투아니아는 독립 이후 바로 중국과 수교했다. 2012년엔 중국과 중유럽·동유럽 경제협력체인 ‘17+1 정상회의’에 참여했다. 2017년엔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참가를 선언하며 국가 간 MOU도 맺었다.

수천명의 홍콩 시민이 2019년 6월 홍콩 범죄인 인도법 폐지를 외치며 거리에 모였다. 시위는 홍콩의 민주화 요구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그들의 요구는 중국 당국과 경찰에 짓밟혔다. AP=연합뉴스

수천명의 홍콩 시민이 2019년 6월 홍콩 범죄인 인도법 폐지를 외치며 거리에 모였다. 시위는 홍콩의 민주화 요구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그들의 요구는 중국 당국과 경찰에 짓밟혔다. AP=연합뉴스

2019년 홍콩 민주화 시위가 시작됐다. 홍콩에서 범죄를 저지르면 중국으로 송환하겠다는 법률에 반대하는 홍콩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이때 ‘우산 시위’와 함께 한 유명한 캠페인이 ‘홍콩의 길’이다. 홍콩 시민들이 손을 맞잡고 독립을 외치며 60㎞의 인간 띠를 이었다. 1989년 리투아니아가 했던 ‘발트의 길’의 ‘오마주’(homage, 존경의 의미를 담아 모방하는 것)였다.

감동받은 리투아니아 국민들 역시 그해 8월 수도 빌뉴스에 모여 중국의 홍콩 탄압을 규탄하는 시위를 열고 지지를 표했다. 홍콩 시민을 응원하는 문구를 담은 나무 십자가를 만들어 민족의 성지(聖地)인 ‘십자가 언덕’에 바치기도 했다. 십자가 언덕은 러시아 제국과 소련 치하부터 저항 운동의 중심지였다. 가톨릭 국가인 리투아니아가 가장 사랑하는 국민적 장소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문하기도 했다.

홍콩 사태가 가라앉지 않았던 2019년 11월 리투아니아의 민족적 성지 '십자가 언덕'에 중국인 관광객이 만행을 저질렀다. 홍콩을 지지하는 이들을 바퀴벌레라고 부르는 문구를 낙서했다. 국가적 성역을 모욕한 중국인에게 리투아니아가 분노했다. 사진 트위터 캡처

홍콩 사태가 가라앉지 않았던 2019년 11월 리투아니아의 민족적 성지 '십자가 언덕'에 중국인 관광객이 만행을 저질렀다. 홍콩을 지지하는 이들을 바퀴벌레라고 부르는 문구를 낙서했다. 국가적 성역을 모욕한 중국인에게 리투아니아가 분노했다. 사진 트위터 캡처

그런데 한 중국인 관광객이 2019년 11월 이곳의 십자가를 훼손하고 리투아니아를 모욕하는 문구를 쓴 영상이 그해 연말 인스타그램을 통해 퍼졌다. 이 중국인은 십자가에 “모든 바퀴벌레가 박멸되기를 원한다. 홍콩이 평화롭게 반환되기를 원한다”는 낙서를 썼다. 리투아니아 국민은 분노했다. 리나스 린케비시우스 당시 리투아니아 외무부 장관은 “수치스럽고 치욕적인 문화적 파괴행위에 대해 당국이 조사하고 있다. 이런 행위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이후 리투아니아의 반중국 정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리투아니아의 든든한 뒷배  

리투아니아가 무모하게 반중국 노선을 걷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뒤에는 든든한 지원군이 있다. 유럽연합(EU)과 미국이다. 지난해 10월 EU 샤를 미셸 이사회 의장과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 두 수장이 동시에 중국의 리투아니아 압박을 “정당화할 수 없는 행위”, “비례에 맞지 않는 처사”라고 비난하며 리투아니아 문제에 공동 대응을 약속했다. 이 여파로 매년 치러졌던 EU-중국 간 정상회의도 무산됐다. 미국도 리투아니아와 6억 달러에 이르는 수출신용협정을 맺으며 경제적 지원을 약속했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은 지난해 9월 란드스베르기스 리투아니아 외무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우리는 중국 등의 경제적 압력에 공동 대처해 나가겠다”며 든든한 지원을 약속했다. AFP=연합뉴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은 지난해 9월 란드스베르기스 리투아니아 외무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우리는 중국 등의 경제적 압력에 공동 대처해 나가겠다”며 든든한 지원을 약속했다. AFP=연합뉴스

EU와 미국 입장에선 리투아니아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리투아니아는 벨라루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벨라루스는 대표적 친러시아 국가이자 러시아 서부 진격의 발판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 위기가 고조되면서 발트 3국의 전략적 중요성도 높아지고 있다. EU와 미국이 리투아니아 등 발트 3국을 유럽 민주주의의 마지노선으로 여기며 지원하는 배경이 여기에 있다.

리투아니아는 최근 ‘난민 밀어내기’를 통해 자국을 위험에 빠트리고 있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미국과 EU의 관심이 필요했다. 또한 미국과 EU는 중국이 외교적 공세에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대한 ‘리트머스 시험지’가 필요했다. 두 가지 외교적 이해관계가 맞물리며 리투아니아의 놀라운 반중국 공세가 가능하다는 해석이 나온다.

리투아니아 언론인 데니스 키시네프스키는 카네기 모스크바 센터 기고문에서 “리투아니아는 중국을 공격하면서 서방의 지지를 얻고, 이를 러시아를 방어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려 한다”며 “미국 역시 리투아니아를 지원하면서 EU 국가들의 반중국 정서를 자극하는 동시에 중국의 반응도 살피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했다.

리투아니아 레이저와 대만 반도체

리투아니아가 중국 대신 대만과 끈을 이으려는 배경에는 경제적 셈법도 있다. 리투아니아의 대중국 경제 의존도는 미미하다. 2020년 기준 리투아니아의 대중국 교역 비중은 수출 1.1%, 수입 4.0%밖에 되지 않는다. 중국이 경제적 보복을 가해도 타격이 크지 않은 셈이다.

리투아니아 산업에서 그나마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분야가 레이저다. 리투아니아는 1966년 첫 레이저를 개발했고, 1990년대 이후 국가적 투자를 받으며 독보적 기술력을 보유하게 됐다. 특히 피코초(10⁻¹²초) 단위 레이저 시장에서 리투아니아는 세계 시장의 약 50%를 점유하고 있다. 미 항공우주국(NASA),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 IBM, 도요타 등이 리투아니아산 레이저를 쓴다.

리투아니아의 레이저는 생산량의 약 80%가 수출되고 매년 약 2000만 유로(약 270억원)를 벌어들인다. 선진국 기준으로 보면 많은 매출을 올리는 건 아니지만, 리투아니아 경제에선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한다. 리투아니아 정부는 2025년까지 레이저로 인한 매출을 GDP의 1% 수준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

리투아니아의 레이저 기업. 리투아니아는 레이저 산업을 특화시켜 국가적으로 육성하고 있다. 다가올 반도체 시대를 겨냥한 포석이다. 사진 리투아니아 정부

리투아니아의 레이저 기업. 리투아니아는 레이저 산업을 특화시켜 국가적으로 육성하고 있다. 다가올 반도체 시대를 겨냥한 포석이다. 사진 리투아니아 정부

이 레이저 기술은 특히 반도체 산업에 활용된다. 정밀도가 높아야 하고 안정성이 필수적이다. 리투아니아는 이 레이저 기술을 앞세워 반도체 강국인 대만과 상생할 방법을 찾고 있다.

도나타스 푸슬리스 리투아니아 빌뉴스 정책분석연구소 미디어 팀장은 “리투아니아가 중국과의 교역량은 적지만, 중국은 여러 나라를 압박해 리투아니아와의 경제 교류를 끊으라는 메시지를 넣고 있다”며 “리투아니아에서도 내부적 논쟁이 있지만 여론은 경제적 이득을 위해 민주주의와 인권, 자유의 가치를 희생하지 말아야 한다는 쪽으로 기운다. 이득을 위해 가치를 버린다면 영혼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다. 큰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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