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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준법감시제도는 기업 리스크 막는 백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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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정준영 서울고법 부장판사

정준영 서울고법 부장판사

미국 리처드 닉슨 정부 시절이던 1973년, ‘워터게이트’ 특별검사에 임명된  아치볼드 콕스는 닉슨 대통령을 탄핵 위기로 몰아넣었다. 그는 정치권력의 수사 개입을 거부함으로써 높은 직업적 윤리의식을 보여줬다. 이 과정은 미국 검찰이 검찰 윤리를 확립하며 국민 신뢰를 회복하는 제도적 기초가 됐다.

워터게이트 특검은 준법 감시 제도(내부 통제 시스템)의 씨앗을 뿌림으로써 미국 사회에 크게 기여했다. 특검은 수많은 기업이 정치인 등에게 뇌물을 건넨 사실을 밝혀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당시 미국 기업의 뇌물 관행을 확인하고 ‘자발적 공개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미국은 ‘워터게이트’가 촉매 역할
2011년 의무화, 투명경영 마중물

그 내용은 기업이 “불법 지출을 하지 않겠다”고 공개 선언하고, 내부 조사를 통해 밝혀낸 불법행위를 자진 신고하면 그 기업에 대해서는 행정 조치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기업 400여 곳이 모두 3억 달러어치의 불법 지출을 신고했다. 경제전문지 ‘포천’ 500대 기업 중 117개나 포함됐다. 이 프로그램은 성공적이었다.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준법 감시 제도를 운용하고, 오래된 뇌물 관행과 절연하는 전환점이 됐다.

이후 준법 감시 방법에 대한 논의는 1991년 ‘연방 양형 기준’ 제8장의 준법 감시 제도 규정으로 집약된다. 미국에서는 임직원이 관여하는 기업 범죄의 경우 기업도 처벌 대상인데, 연방 양형 기준은 준법 감시 제도를 실효적으로 운영하는 기업에 대해서 벌금을 대폭 감경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기소된 기업 중 준법 감시 제도를 실효적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판단된 기업은 거의 없었다. 그 대신 법원은 실효적 준법 감시 제도 운용을 조건으로 하는 기업 보호 관찰 명령을 계속 선고했다. 지금까지 기업 보호 관찰 명령을 받은 기업은 1500개가 넘는다. 법원이 준법 경영의 촉매 역할을 한 것이다.

델라웨어 주 법원은 1996년 케어마크(Caremark) 판결에서 “이사에게는 준법 감시 제도가 실효적으로 운영되도록 할 의무가 있고 이를 다하지 못해 생긴 손해에 대해서 배상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정착된 미국의 준법 감시 제도는 준법 윤리 경영의 방향타 역할을 했고, 세계 각국으로 퍼졌다.

한국의 준법 감시 제도는 2000년 은행법 개정에 따라 처음 금융회사에 도입됐다. 금융감독 당국과 금융회사의 지속적 노력으로 정착되고 있다. 국민은행은 준법 감시인의 리스크 관리 덕분에 ‘라임 펀드 사태’를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준법 감시 제도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사건이다. 일반 기업의 경우 2008년 대법원이 “대규모 회사의 이사는 준법 감시 제도가 제대로 작동되도록 노력할 의무가 있다”고 처음 판결했다. 그 후 2011년 상법 개정에 따라 대규모 상장회사에도 준법 감시 제도가 의무화됐다.

2021년에는 의미 있는 판결들이 선고됐다. 서울고등법원은 지난해 1월 임직원의 불법 행위 방지를 위해서는 실효적 준법 감시 제도가 필요하다는 형사 판결을 했다. 9월에는 준법 감시 제도가 없거나 실효적으로 작동하지 않아서 발생한 기업의 손해에 대해서 대표이사는 물론 이사 및 사외이사도 배상 책임이 있다는 민사 판결을 했다. 11월에는 대법원이 준법 감시 제도 구축을 위한 노력을 다하지 않은 대표이사는 그로 인해 회사가 물게 된 과징금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다.

이러한 흐름은 기업 활동에 제약이 된다는 우려도 있다. 하지만 기업이 준법 감시 제도를 실효적으로 운영하면 각종 리스크를 예방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임원들의 손해 배상 책임도 면제·감경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기업 활동에 긍정적인 측면이 크다. 일련의 판결과 입법, 그리고 선도적 기업들의 노력이 한국의 준법 경영 문화가 뿌리내리는 데 마중물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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