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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하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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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한영익 기자 중앙일보 기자
한영익 정치에디터

한영익 정치에디터

하방(下放)은 20세기 중반 등장한 중국 공산당의 정치운동이다. “지식인은 반드시 노동자·농민과 서로 결합해야 한다”는 이념에 따라 당원과 공무원들을 농촌이나 공장에 보내 일하도록 했다. 문화대혁명(1966~1976) 와중에 마오쩌둥 전 국가주석이 이른바 ‘하방 지시’를 하면서 본격화했다. 이 기간 중국의 도시 지식청년 수백만 명이 농촌으로 보내져 육체노동을 했다.

정치적으로 하방은 숙청 내지는 유배를 뜻했다. 중국 개혁개방의 상징이었던 덩샤오핑은 정적들에 의해 주자파(자본주의 노선을 주장하는 파벌)로 몰려 1969년 난창(南昌)의 한 트랙터 공장으로 하방을 당했다. “내 일생 중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기”라고 그는 당시를 회고했다. 마오쩌둥을 향한 처절한 편지 구애 끝에 덩샤오핑은 1973년 특별열차를 타고 베이징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시진핑 주석에게도 하방은 아픈 기억이다. 1969년 시 주석의 부친 시중쉰 부총리가 숙청되면서 당시 15세였던 시 주석도 산시성 북부 량자허(梁家河)촌이라는 오지에서 7년 동안 토굴 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 토굴에서 벼룩과 싸우며 9전 10기 끝에 공산당에 입당했다. 1975년 칭화대에 입학해 가까스로 베이징 입성에 성공했다.

정치·역사적 맥락에서 어두운 면이 부각된 단어지만, ‘아래로 보낸다. 추방한다’는 말뜻에도 그늘은 있다. 수도를 떠나는 게 곧 신분 하락이라는 걸 암시하는 듯해서다.

대선을 앞둔 한국 정치권에서도 ‘하방’이 등장했다. 지역구 국회의원들의 현장 선거운동을 독려하는 과정에서다. “모든 것을 비우고 하심·하방하여 새롭게 다시 출발하자”(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 11월 21일)거나 “모든 국회의원·당협위원장은 하방해야 한다”(홍준표 국민의힘 의원, 12월 31일)는 말이 정치인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나왔다. 지역구 국회의원들은 고개 숙인 하방 인증샷을 경쟁적으로 올리고 있다.

A당의 한 보좌진이 은연중 한탄했던 기억이 난다. “하방이 뜻을 되짚어보면 부정적 의미인데, 알고 쓰는 건지…”라는 혼잣말에 가까운 되뇌임이었다. 여의도에는 “정치는 말의 예술”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잊을만 하면 설화 논란을 빚는 우리 정치가 바뀌려면, 신중한 단어 선택이 먼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