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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격랑의 대선판, 어떤 수를 둬야 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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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바둑판

바둑판

무궁무진한 바둑의 수, 그중 내가 두는 수는 무엇이고 내가 원하는 바둑은 무엇일까. 세상의 현자들이 권하는 대로 정수를 두며 꾸준히 나아갈까, 아니면 묘수를 두어 훨훨 날아볼까.

정수(正手)는 문자 그대로 올바른 수임에도 종종 답답한 이미지를 띈다. 꽃피는 봄날처럼 판이 기분 좋게 흘러간다면 정수가 맘에 들 것이다. 대개는 그 반대이기에 정수는 매력 없는 수가 되고 만다. 코로나 시대의 거리두기처럼 재미도 없다. 실제 형세가 곤궁한데도 정수만 고집하면 역전의 희망은 점점 멀어진다. 이창호는 끝없는 인내로 세계를 제패했지만 그건 수도자의 경지이고 흉내 내기는 어렵다. 불리해지면 판을 흔들어 재빨리 역전의 단서를 찾아내는 것, 승부수를 던지거나 기사회생의 묘수를 꿈꾸는 것이 보통사람의 가슴에 와 닿는다.

바둑판 위에서 승부수는 얼마든지 던질 수 있다. 그러나 한 번뿐인 실제 인생에서 승부수를 던진다는 것은 보통 결단으로는 어렵다. 지난해를 복기한다면 영혼까지 끌어모아 집을 산다는 소위 ‘영끌’은 이 시대 젊은이들의 독창적인 승부수일까. 아니면 초조감이 빗어낸 무모한 강수일까.

코인 투자로 수백억원을 번 샐러리맨 얘기는 많은 젊은이의 부러움을 샀다. 인생의 묘수는 이런 것이다 하고 보여주는 것 같았다. 바둑에서도 묘수는 가장 근사하게 다가온다. 절망적인 형세를 일거에 뒤집는 회심의 묘수. 그러나 바둑에는 “묘수 세 번이면 필패”라는 오랜 교훈이 전해진다. 묘수는 패망과 죽음으로 내몰리는 백척간두의 어딘가에 존재한다. 그 힘든 상황을 세 번이나 넘었으니 어찌 기운이 남아있으며 바둑을 이기기를 바랄 것인가.

바둑에는 빠른 수와 느린 수, 엷은 수와 두터운 수, 점잖은 수와 속된 수, 가벼운 수와 무거운 수, 공격수와 수비수, 강수와 약수, 선수와 후수, 승착과 패착이 있다.

또 스스로 목을 죄는 자충수, 상대를 벼랑으로 유도하는 함정수, 꼼수, 무리수, 악수, 과수, 덜컥수, 헛수 등 온갖 수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서봉수 9단은 이렇게 말한다. “바둑에는 정수와 실수 두 가지 뿐이다.” 전문가들은 삭막하다. 평생 뼈저린 승부를 겨루다 보면 온갖 수사들이 허망하게 다가오는 탓일 게다.

대선판이 격랑 속으로 빠져들며 표심을 쫓아 온갖 수들이 난무한다. 예리한 응수타진이나 강력한 승부수보다는 강수의 유혹에 빠져 자충수와 무리수를 던지는 허망한 수읽기도 눈에 띈다.  자충과 무리,  사실 이 두 가지는 실수의 대명사와 같다. 바둑은 실수의 게임이고 선거도 실수의 게임이다. 좋은 수 세 개가 실수 한 개를 못 당한다. 실수는 실력 부족이 첫째고 유리할 때의 방심이 두 번째고 불리할 때의 초조감이 세 번째다.

새로 바둑의 신이 된 AI는 두 가지를 선호한다. 두터운 수와 선수(先手)다. 두터움은 발이 느리고 선수는 발이 빠른데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까. 이 이율배반이 AI의 비밀이고 인간 고수들이 풀어야 할 숙제다.

두터움은 바둑에서 가장 정의하기 어려운 단어지만 눈앞의 실리와 대척점에 있다는 건 분명하다. 실리를 추구하면 주변이 엷어진다. 두터움은 “어느 날 빵처럼부풀어 오르는 것”(후지사와 슈코 9단)으로 삶에 비교하면 인품이나 우정, 배움 같이 켜켜이 쌓이는 것일 게다. 전쟁터에서 적장을 품위 있게 대하는 장수는 대개 명장이다. 두터움을 아는 존재다. 솔직히 두터운 수는 알면서도 두기 힘들다. 그러나 이기고 싶은 사람은 두터운 수를 두어야 한다.

인생살이는 꼭 승부가 아니다. 승부가 아니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태어날 때부터 유리한 판을 받은 사람과 태어날 때부터 불리한 판을 받은 사람이 승부를 벌인다면 그 승패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므로 2022년, 바둑팬들에게 바라는 것은 이기는 수도 지는 수도 맘껏 두어보며 ‘재미있게’ 살았으면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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