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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안타까운 그리움으로 돌아본 우리의 리즈 시절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홍미옥의 모바일 그림 세상(90)

네, 다섯 살쯤 되었을까? 빛바랜 흑백사진 속에 시간이 멈춰 서 있다. 커다란 깜장 색안경을 쓴 꼬마가 활짝 웃고 있다. 친구인듯한 인형을 꼭 끌어안은 품새와 앙증맞은 원피스 차림이 여간 귀여운 게 아니다. 잔뜩 멋을 부린 브론즈 액자 틀 속의 아가씨도 보인다. 아마도 그 시절엔 내로라하는 멋쟁이였음이 분명하다. 긴 머리 위에 살포시 얹은 베레모와 엄지장갑, 싱그런 미소와 손짓은 보는 이들을 기분 좋게 만든다.

'우리들의 리즈시절'. 아이패드.프로크리에이트. [그림 홍미옥]

'우리들의 리즈시절'. 아이패드.프로크리에이트. [그림 홍미옥]

우리도 있었다, 빛나던 리즈시절!

언젠가부터 주위 친구나 지인들의 카톡 프로필 사진은 너 나 할 것 없이 꽃 사진으로 통일되어 가고 있었다. 봄이면 전국 팔도에 피는 벚꽃을 시작으로 여름이면 풍성하고 탐스러운 수국이 벚꽃을 대신한다. 가을이야 말할 것도 없이 오색찬란한 단풍 혹은 코스모스, 국화가 그 자릴 약속이나 한 듯이 차지하고 나섰다.

간혹 결혼을 일찍 한 지인들은 사랑스러운 손주 사진이 온갖 꽃들을 물리치고 자신을 표현하는 한 컷으로 등극한다. 어느 날, 그렇게 꽃이나 손주가 장악(?)한 단체 대화방 프로필 사진첩에 재밌는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한눈에도 세월의 흔적이 보이는 사진이었다. 사진 속 아가씨는 한껏 치장을 하고 있었다. 만화 속에서 보던 공주님 같은 화관에 풍선처럼 부풀린 소매의 드레스 차림이었다. 게다가 새침한 미소는 어찌나 이쁘던지….

당연히 단체 대화방은 난리가 났다. 몇 살 적 모습이냐, 왜 이렇게 이쁜 거냐! 혹시 전직 왕족이었냐부터 시작해 왕자님은 어디 갔느냐까지 온갖 대화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한때 드레스를 입고 사진 찍기가 유행이었다는 대답과 함께 모두는 시간을 되돌리기에 바빠졌다. 나도 그랬노라고, 나도 소녀시절이 있었노라고, 우리도 빛나는 리즈시절이 있었다고!

사진속으로 떠나는 우리들의 리즈시절. [사진 김윤희, 박영애]

사진속으로 떠나는 우리들의 리즈시절. [사진 김윤희, 박영애]

사진으로 떠난 추억의 시간여행

세상 시크하고 늘씬한 롱다리 처녀도 등장하고 모범생 스타일의 화사한 봄 처녀도 등장했다. 그런가 하면 흑백사진 속에서 뛰놀던 귀여운 꼬마들도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뭔가를 입에 물고 엄마 옆에 서 있는 자그만 어린아이, 야외로 소풍 나간 가족들 사이에서 반듯하게 서 있는 소녀 등등 꽤 긴 시간 동안 우리들의 시간 여행은 계속되었다. 행여 질세라 볼이 터질 듯이 빵빵한 여섯 살의 나도 흑백사진으로 그 대열에 동참했다. 유치원 재롱 잔치였던 듯싶다. 무용복을 입고 어른처럼 화장을 하고 있는 내가 있다. 지금으로선 믿을 수 없게 젊던 엄마가 내 옷매무새를 만지고 있다. 백콤을 잔뜩 넣어 부풀린 머리 모양의 내가 카메라를 보며 웃고 있다. 아마도 동네 미장원 원장의 솜씨였음이 분명하다.

보고 있자니 어렴풋이 그날이 생각날 것 같기도 하다. 몇십 년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던 일들이 흑백사진 한장에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아주 즐겁고 유쾌함으로 때론 안타까운 그리움으로.

지금도 진행형인 우리들의 리즈시절

흔히들 하는 말, ‘리즈시절’ 많이들 알고 있겠지만 아래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리즈(Leeds)시절’은 지나간 전성기를 일컫는 신조어다. 처음에는 축구와 관련된 표현에서만 사용되었지만 지금은 현재는 전성기, 황금기 등과 같이 찬란했던 과거 시절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다. ‘나는 태어났을 때가 리즈 시절이었어’, ‘내 인생의 리즈 시절은 지금인 것 같아’처럼 사용할 수 있다.

굳이 원하지 않아도 가만히 있어도 먹게 되는 게 ‘나이’다. 2022년 임인년을 맞으면서 또 한 살을 먹고야 말았다. 우스갯말로 해마다 꼬박꼬박 먹다 보니 내 나이가 몇 살인지조차 잊어버릴 지경이다. 가끔 연로하신 부모님 나이를 헷갈려 하듯 말이다. 지나고 보니 구겨진 흑백사진 속 통통한 소녀도, 공주님 같던 아가씨도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우리들의 리즈시절이었던 셈이다. 몇 년 후일지는 몰라도 어린 손주를 품에 안은 우리들의 모습도 그 순간만큼은 가장 빛나는 시간이 될 게 분명하다.

다가올 시간도 내가 오롯이 꾸려나가야 할 시간이다. 그렇다면 그 시간 속 주인공인 우리들의 리즈시절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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