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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중앙] 판타지 속 판타지를 찾아서 48화. 지도

중앙일보

입력

그곳에 가고 싶다…상상의 원천, 지도

오래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시험 채점을 하다가 우연히 ‘호빗(Hobbit)’이라는 말을 쓴 그는 자신이 쓴 이 단어가 무엇인지 고민했죠. ‘한 굴에 호빗이 살고 있었다’라는 말을 보고 고민하던 그는 한 장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굴이라기에는 훨씬 안락해 보이는 느낌의 저택 입구 같은 장소에서 담배 파이프를 물고 있는 작은 사람의 모습, 그리고 둥글고 거대한 문 너머로 펼쳐진 바깥 풍경. 이렇게 그림을 그리고 나니, 저 바깥 풍경에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특히 언덕을 넘어서 돌아간 길 저편에 과연 어떤 풍경이 펼쳐져 있을지 알고 싶어졌죠. 그렇게 생각한 그는 그 세계의 지도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저기로 가면 무엇이 있고, 저 멀리 거대한 산이 있는데 산의 이름은 외로운 산이라고 한다. 그 외로운 산에는 한 마리 용이 있는데… 그렇게 지도를 만들어나가던 그는 한 명의 호빗이 동료들과 함께 그 세계를 여행하는 이야기를 펼쳐냅니다. 그리고 이를 아이들에게 들려주기 시작했죠. 훗날『반지의 제왕』으로 판타지 세계에 큰 영감을 준 작가, J R R 톨킨의 이야기입니다.

톨킨은 “복잡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면 반드시 지도를 만들어야 한다. 아니면 나중에 그 이야기에 대한 지도를 결코 만들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처럼 오래전부터 많은 이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만들면서 그에 대한 지도를 그리곤 했습니다. 톨킨의 가운데 땅만이 아니라『나니아 연대기』를 쓴 C S 루이스도 간단하나마 지도를 그려냈죠. 그 밖에도 많은 이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위한 지도를 만든 것은 유명하죠.

지도는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의 상상을 자극하는 물건이었습니다. 물론 군사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물건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는데요. 한 장군은 “내게 정확한 지도를 주면, 나라를 정복해 보이겠다”라고 했다고 하는데, 진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만큼 지도가 중요한 물건이라는 얘기겠죠. 우리나라에서도 지도는 매우 중요한 전략적 자료였습니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가 멋대로 지도를 만들어서 감옥에 갇혀 죽었다는 설이 나왔을 정도입니다. 이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의 역사학자들이 만들어낸 얘기지만요.

‘대동여지도’와 관련해서는 김정호가 전국 각지를 전부 답사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 역시 사실은 아닙니다. 쥘 베른이 파리의 집에 앉아서 세계뿐만 아니라 우주까지 여행했고, 프랑스의 지리학자 당빌 역시 프랑스에서 한발짝도 나가지 않고 세계 지도를 그린 것처럼, 김정호 역시 다양한 기존 기록과 문물, 상상력을 통해 놀라운 지도를 완성한 거죠. 지도는 사람들의 상상을 끌어내는 원천이지만, ‘대동여지도’의 사례처럼 지식과 상상력은 동시에 지도를 완성하는 중요한 힘입니다. 상상이 지도를 만들고, 다시 지도로부터 이야기를 상상하면서 상상의 세계는 더욱 넓어져 가는 것이죠.

영국도서관이 소장 중인 ‘요정 나라 지도’. 온갖 동화·전설·신화 속 장면 등이 담긴 그림을 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이 세계에 가 보고 싶다’라는 마음을 갖게 된다.

영국도서관이 소장 중인 ‘요정 나라 지도’. 온갖 동화·전설·신화 속 장면 등이 담긴 그림을 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이 세계에 가 보고 싶다’라는 마음을 갖게 된다.

여기 한 장의 그림이 있습니다. ‘요정 나라의 옛 지도(An ancient mappe of Fairyland)’. 폭이 1.4m를 넘는 이 그림에는 그야말로 동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전설적인 땅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죠. 천사와 요정이 돌아다니고, 신비한 천마와 인마들이 뛰어놉니다. 바다에는 커다란 범선이 위대한 항해자들을 태우고 질주하고 있으며, 산 위엔 커다란 거인들이 바람을 헤치고 걸어 다닙니다. 전설 속, 신화 속의 존재들이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죠.

물론 여기에는 선량하고 평화로운 풍경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산속 동굴에는 수많은 머리를 가진 히드라가 있으며, 그 옆에는 세 개의 머리를 가진 지옥의 문지기 개, 케르베로스가 자리 잡고 있죠. 어두운 숲속에는 요정이 음모를 꾸미고 있으며, 소용돌이가 배를 집어삼키기도 합니다. 아서왕의 아발론부터, 피터팬의 네버랜드에 이르기까지 온갖 동화와 전설, 신화 속의 장면이 가득한 그림. 이처럼 무섭고 위험한 광경과 평화롭고 매력적인 풍경이 함께 존재하는 이 그림을 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이 세계에 가 보고 싶다’라는 마음을 갖게 되죠.

이 그림은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끔찍한 전쟁이 끝난 직후에 소개되었습니다. 참혹한 전쟁터와 수많은 사상자의 모습에 질렸던 유럽인들에게 이 그림은 어떤 느낌으로 다가왔을까요. 잘은 모르겠지만, 분명 우리와 마찬가지로 동화 속 요정의 나라를 여행한다는 마음을 느꼈을 것입니다. 끔찍한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동화 세계의 다채로운 꿈을 노니며 마음을 치유했겠지요. 톨킨이 제1차 세계대전의 참상 속에서 실마릴리온의 이야기를 꿈꾸며 마음의 위안을 얻었듯 말이죠.

겨울입니다. 추운 날씨도 있지만, 코로나19로 인해 바깥에 나가기 힘든 나날이 계속되고 있죠. 이럴 때는 한 번쯤 상상을 통해 여러분만의 지도를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아니면, 판타지 세계의 다양한 지도를 살펴보며 상상 여행을 해 보는 것은요? 분명 거기에서는 여러분만의 판타지 이야기가 흘러나올 것입니다.

전홍식 SF&판타지도서관장

전홍식 SF&판타지도서관장

※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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