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먹빛으로 마음을 쓸겠습니다

중앙일보

입력 2022.01.03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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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한국화가 강미선의 작품 ‘관심(觀心)-세심(洗心)’(2021, 139x191㎝·왼쪽). [사진 금호미술관]

한국화가 강미선의 작품 ‘관심(觀心)-세심(洗心)’(2021, 139x191㎝·왼쪽). [사진 금호미술관]

큰 한지 화면에 싸리 빗자루 하나가 담겼다. 차분한 먹빛과 섬세한 붓질이 함께 자아낸 분위기 때문일까. 보는 이로 하여금 ‘빗자루로 훌훌 쓸어낼 대상은 마당이 아니라 마음의 먼지’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한다. 한국화가 강미선(60)의 작품 ‘관심(觀心)-세심(洗心)’이다.

강미선 작가는 현재 국내에서 활동하는 수묵화가 중 담묵(淡墨·옅은 먹빛)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작가로 꼽을 만하다. 일상에서 흔히 만나는 풍경과 사물을 담담한 먹빛으로 그려내며 관람객에게 사색의 순간을 선사한다. 강미선의 개인전 ‘水墨(수묵), 쓰고 그리다’가 서울 삼청동 금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금호미술관이 기획한 대규모 초대전으로 지하 1층부터 3층까지 모두 7개의 전시실을 그의 수묵화 35점으로 가득 채웠다.

전시에선 그림의 바탕인 종이, 즉 한지의 강력한 존재감을 만날 수 있다. 관람객은 글씨와 그림을 품은 한지의 다채로운 색상에 놀라고, 또 부드러운 것부터 바위 표면처럼 우툴두툴한 것까지 한지의 풍부한 질감에 다시 놀란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바탕지 만들기가 작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고 말했다. 여러 겹의 한지를 쌓아 올리고 표면을 두드리는 과정에서 두꺼워지고 단단해진 바탕지에 엷은 먹물을 입히는 것이 그림의 시작이다.

“종이를 겹쳐 붙이고 두드리면 찢어질 것 같은데 실제론 그 반대로 굉장히 단단해져요. 거기에 담묵을 올리면 종이는 그걸 다 받아냅니다. 매끈한 것보단 고목의 표면이나 바위 같은 거친 질감이 나는 게 좋아서 꼭 이렇게 작업합니다.”

금강경의 5149자를 한 글자씩 써서 완성한 ‘금강경-지혜의 숲(3.5mx22m)’ 앞의 강미선 작가. [사진 금호미술관]

금강경의 5149자를 한 글자씩 써서 완성한 ‘금강경-지혜의 숲(3.5mx22m)’ 앞의 강미선 작가. [사진 금호미술관]

오광수 미술평론가는 이를 “화면을 수묵으로 다독이는 작업”이라고 표현한다. 그는 이 작업을 “여러 겹을 발라올린 한지의 표면은 그 자체가 살아 숨 쉬는 공간으로 태어난다. 화면에 나타나는 풍경이나 정물이 어떤 기대감으로 설레게 하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에서 한지의 다양한 색감과 먹빛의 매력을 웅장한 풍경처럼 한눈에 보여주는 작품이 수묵 설치 작품 ‘금강경(金剛經)-지혜의 숲’이다. 불경 ‘금강경’을 넉 달에 걸쳐 세로·가로 11㎝의 작은 한지 조각에 한 글자씩 총 5149자를 썼다. 3층 전시실 3개 면을 세로 3.5m, 가로 22m 크기로 덮었다.

강씨는 “그림화된 글자로 봐줬으면 한다”며 “전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봐달라”고 했다. 그는 “매일 밤 적게는 몇장, 많게는 몇십장을 썼다”며 “정형화된 글씨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썼다”고 밝혔다.

‘금강경’은 공(空) 사상을 짧고 함축적으로 담은 대승불교 경전이다. 왜 이를 택했을까. 작가는 “1998년부터 전국 사찰을 순례했고, 매일 금강경을 읽은 지 5~6년이 됐다”며 “종교를 떠나 금강경은 지혜의 책”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수행(修行)과 작업은 하나였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은 시간이 작품으로 형상화했다.

담쟁이덩굴과 나무, 빗자루와 의자, 파초 등 소소한 풍경과 정물을 차분하게 표현한 ‘관심(觀心)’ 연작도 눈길을 끈다. 희미한 그림자만으로 한 그루 나무의 존재감을 드러낸 ‘그림자(影)’가 대표적이다. 오 평론가는 “(강미선의) 사물들은 조심스럽게, 아니 담담하게 자신을 드러내 보인다”며 “서서히 걷히는 운무 속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풍경화같이 다가온다”고 표현했다.

명상을 주제로 감을 이용한 회화 설치 ‘무언가(無言歌)’ 연작과 강한 묵의 필선으로 현대적인 조형미를 구현한 ‘한옥’ 연작, 전통 서가도 형식을 현대적으로 풀어낸 ‘서가도(書架圖)’ 등은 전통의 틀에 안주하지 않고 수묵의 새로운 가능성을 꾸준히 탐구해온 작가의 여정을 보여준다.

홍익대 동양화과 출신의 강씨는 중앙미술대전 대상(1998)을 받고, 중국 난징(南京) 예술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학했다. 그는 “수묵화가로서 이런 규모의 초대전에서 작품을 보여줄 수 있어 감사하다”며 “관람객이 제 그림을 보면서 잠시라도 편안함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시는 2월 6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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