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핵약속 깬 증거 넘치는데…"우린 믿어야한다" 외교장관 왜 [뉴스원샷]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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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용 외교부 장관이 12월 29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내신기자 대상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의용 외교부 장관이 12월 29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내신기자 대상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유지혜 외교안보팀장의 픽 : 정의용 장관 기자간담회

“아무래도 그 사람 바람피우는 것 같아. 아니, 확실해. SNS에 다른 사람이랑 찍은 사진을 올리고, 어떻게 된 건지 설명도 안 해.

어쩐지 내가 그렇게 말해도 통 시큰둥하던 약혼 이야기에 갑자기 좋은 생각이라면서 관심 있는 척하더라. 물론 그것도 내 절친들이 잔소리를 그만해야 한다는 조건이긴 했어. 내 친구들이 ‘거짓말하지 마라’, ‘주먹 함부로 쓰면 안 된다’ 이런 이야기할 때마다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러고 사는데, 걔들은 왜 나한테만 그러느냐”면서 우리 사이 갈라놓으려는 거라고 화내곤 했었어.

사실 바람피운 게 놀랍지는 않아. 잠깐 다른 사람에게 눈이 간 것뿐이라고, 이제 정말 다 끊어버리겠다고 약속한 게 몇 번인지. 하지만 그럴듯한 약속 뒤에는 어김없이 배신이 따라왔지.

모르고 속고 알고 속아주며 보낸 시간이 얼마인지 몰라. 그런데 그 결과가 또 바람이라니…. 누가 그러더라, 바람둥이는 뼈에 새기고 태어나는 거라고. 난 이제 어떻게 하지.”

정의용 외교부 장관이 12월 29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내신기자 대상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의용 외교부 장관이 12월 29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내신기자 대상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고민하는 내게 한 친구가 이런 조언을 한다.
“그래도 전에 바람 안 피운다고 약속했었잖아. 한번 약속한 건 계속 믿어줘야지. 안 그러면 그 사람은 네 사랑이 진심이 맞냐고 의심하게 될 거야. 바람 걱정은 일단 좀 접어두고, 우선 약혼식부터 추진해보면 어때?”
이 친구는 나를 진심으로 위해주는 걸까.

12월 29일 정의용 외교부 장관이 내신 기자 간담회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비핵화 의지에 대해 내놓은 설명이 꼭 이랬다.

2018년 3월 특사단을 이끌고 방북해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를 직접 확인했다는 정 장관에게 김정은이 당시 약속했던 비핵화의 정의는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혹시 조건부 비핵화는 아니었는지 물었다. 하지만 그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여전히 김정은에게 비핵화 의지가 있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을 뿐이다.

“한반도 비핵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의지를 일단 평가하면서 협상해야 한다. 상대방이 의지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협상에 임하면 상대방이 우리 측의 협상에 대한 진정성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되기 때문에 상대방의 의지를 믿어주는 방향으로, 그런 자세를 가지고 협상을 해야 한다고 본다.”

여전히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를 신뢰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취지였다.

지난 2018년 3월 북한을 방문 중인 정의용 수석 대북특사가 평양에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과 만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018년 3월 북한을 방문 중인 정의용 수석 대북특사가 평양에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과 만나고 있다. 연합뉴스

‘김정은의 비핵화’란 과연 무엇이었고, 이를 여전히 신뢰하는지는 지금에 와서 더 중요한 질문이다. 북한이 영변 핵시설에 이어 평안북도 박천 우라늄 공장을 재가동하려는 정황이 포착되는 등 다시 핵 욕망을 불태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담회에서는 “여전히 북한의 핵 모라토리엄(유예)이 지켜지고 있다고 보느냐”는 질문도 나왔다. 정 장관은 “한‧미 간에 특히 북한 상황을 면밀히 모니터링하고 있다”고 답했다. ‘북한이 약속을 깬 것이냐, 아니냐’고 물었으니 ‘그렇다, 아니다’로 답하면 되는데, 동문서답이다.

이처럼 북한이 모라토리엄을 깬 증거가 넘쳐나는데도 정 장관이 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따로 있어 보인다. 그간 ‘북한이 모라토리엄을 지켰으니 보상하자’고 주장해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이제는 제재 완화를 고려할 때가 됐다. 왜냐하면 북한은 4년 동안 모라토리엄(핵ㆍ장거리 미사일 실험 유예)을 유지했기 때문”(2021년 9월 22일 미국 외교협회 초청 대담)이라면서다.

그러니 모라토리엄이 깨졌다고 시인하는 순간 대북 보상의 근거도 사라지게 되는 셈이다.

북한이 지난 7월 초 이후 영변의 핵시설을 재가동한 것으로 보인다고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우려했다. 연합뉴스

북한이 지난 7월 초 이후 영변의 핵시설을 재가동한 것으로 보인다고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우려했다. 연합뉴스

그러면서 정 장관은 간담회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은 더욱 악화하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북한을 대화로 견인해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재가동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든 만나 무슨 이야기든 할 수 있다는 미국의 거듭된 제안에 꿈쩍 않는 건 북한이다. 마음이 급한 정부는 일단 종전선언을 매개로 대화 테이블에 앉아서 원하는 이야기를 해보라고 설득한다. 결국 ‘북한이 모라토리엄을 깼어도 결론은 또 보상해주자는 것이냐’는 질문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북한 주요 핵시설 현황 연합뉴스

북한 주요 핵시설 현황 연합뉴스

이는 마치 신나게 바람피우는 연인에게 뭐라도 쥐여줘서 일단 약혼식장에 들어서게 하자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래서 그런 사람과 정말 약혼까지 하고 나면, 내 인생은 뭐가 되나.

물론 남북은 상대방이 바람피울 경우 헤어져 각기 제 갈 길 가면 그만인 단순한 연인 사이가 아니다. 하지만 못된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어영부영 관계를 지속하다 보면 결국 망가지는 건 내 인생이란 점에서 본질은 같다. 차이가 있다면, 북한의 ‘바람’을 잡지 못하면 망치는 건 인생 하나가 아니라 대한민국 5000만 국민의 안전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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