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제2부속실을 폐지하겠다”(22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
“남편이 대통령이 돼도 아내 역할에만 충실하겠다”(26일 배우자 김건희 씨)
지난 22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공약한 ‘청와대 제2부속실 폐지’를 둘러싼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윤 후보의 배우자 김건희 씨 관련 각종 의혹이 쏟아지던 상황에서 나온 이 말의 의도를 놓고, “김건희 감추기”라는 여당의 비판은 물론 야당에서도 “당론은 아닌 것 같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도 직접 반응했다.
이 후보는 29일 인터뷰에서 “본인에게 생긴 문제를 덮기 위해 제도를 없애버리겠다는 것은 납득이 안 된다”며 “부인에게 문제가 있으면 부인 문제를 해결해야지 제도를 없애버리느냐”고 말했다. 그러면서 “퍼스트레이디라는 게 폼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부인 외교라는 것도 있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윤 후보 측 이용호 공동선대위원장은 “배우자와 사별했거나 미혼인 사람은 대통령이 되면 안 된다는 것인가”라며 “이 후보는 대체 어느 시대를 살고 있느냐”고 반박했다.
그러자 청와대를 경험한 청와대 참모 출신 인사들이 가세했다.
국정상황실장 출신으로 대통령의 ‘복심’으로 불린 윤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청와대 자체가 대통령과 영부인을 위한 지원조직”이라며 “조 바이든 대통령이 방한하면 질 바이든 여사가 같이 오는데, 바이든 여사와 외교를 담당하는 건 영부인이다. 경력에 문제가 있다고 ‘영부인이 없다’ 이게 말이 되는가”라고 말했다.
청와대 대변인을 맡았던 고민정 의원도 “본인이 국민 앞에 나서기 껄끄럽다는 이유만으로 대한민국 영부인의 자리를 없애겠다는 건 굉장히 자만이고 착각에 빠진 것”이라며 “영부인의 역할은 본인이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의 영역이 아니다”라고 했다.
실제 정상외교에서 대통령 배우자의 역할은 적지 않다.
문 대통령의 가장 최근 정상외교는 지난 17일 샤브카트 미르지요예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의 국빈방한 일정이다. 당시 청와대가 공개한 일정 6개 가운데 정상회담과 회담에 따른 협정 서명식을 제외한 공식환영식, 방명록 서명, 친교오찬과 국빈만찬 등 4개 일정이 ‘부부 동반’으로 진행됐다.
김 여사는 이 외에도 영부인끼리의 별도 친교환담과 국립재활원 방문 일정을 진행했다.
노무현 정부 청와대에서 제2부속실장을 지냈던 민주당 전재수 의원은 31일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부속실을 없애더라도 영부인의 외교활동 등과 관련한 의전과 경호, 수행은 누군가 담당해야 한다”며 “청와대의 조직과 기능을 개편하는 차원이거나, 또는 부속실의 법적 권한과 관련 명확한 근거를 마련하자는 것이라면 몰라도, 배우자 의혹이 불거진 시점에 나온 돌발 주장에 국민들이 공감할지 의문”이라고 했다.
미국은 미국연방법전(USC)에서 대통령 배우자가 대통령을 지원할 경우 대통령과 같은 지원과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반면 한국의 경우 배우자 등 ‘대통령과 그 가족’을 경호의 대상으로 규정한 대통령경호실법 외에 대통령의 배우자의 지위나 역할을 명확히 규정한 법률이 없다.
그럼에도 대통령 배우자 역할의 중요성을 감안해 박정희 정부 때인 1969년 처음으로 청와대 제2부속실이 신설돼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다.
실제 청와대 홈페이지에 공개돼 있는 김 여사의 최근 일정을 보면 김 여사의 역할은 대통령을 보완하는 의미의 이른바 ‘퍼스트레이디 외교’에 국한되지 않는다.
김 여사는 23일엔 문 대통령과 함께 백령도를 방문해 군 장병들을 위로했다. 백령도 방문 중에는 김 여사가 여군 등을 따로 만난 별도 일정도 있다. 29일엔 공주대 부속 장애인 특수학교 기공식에 참석해 문 대통령에 앞서 마무리발언을 했다.
김 여사는 12월 중 문 대통령의 호주 순방에 동행한 것을 비롯해 ‘한류 큰잔치’ 영상축사(16일), 기부ㆍ나눔단체 간담회(3일), 나눔캠페인 출범식(1일) 등 여사 단독 행사도 적지 않게 진행했다.
김 여사는 이전에도 청와대 경내에서 수확한 감으로 곶감을 만들어 국빈방한 때 디저트로 내놓는 등의 전통적 의미의 ‘내조’는 물론, 수해 현장을 방문해 수해복구를 돕기도 했다. 해외 순방 때마다 한류관련 행사나 장애인ㆍ노인 복지시설 방문 등도 김 여사의 몫이었다. 2018년엔 김 여사가 단독으로 인도를 방문한 적도 있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원장은 “특히 최근 들어 각국은 각자가 가진 외교적 총역량을 투입하는 첨예한 외교전이 가속화하고 있다”며 “이미 ‘퍼스트레이디 외교’는 단순한 내조의 수준을 넘어 정형화된 총력 외교의 주요축이 됐기 때문에 영부인의 역할과 관련한 논의는 매우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11명의 역대 퍼스트레이디는 누구
3월 9일 대선으로 20대 대통령이 선출되면 대통령의 배우자인 ‘퍼스트레이디’ 또는 ‘퍼스트젠틀맨’이 함께 탄생한다.
지금까지의 대통령은 12명, 역대 퍼스트레이디는 11명이다. 18대 박근혜 전 대통령이 최초의 여성이었지만, 미혼이었기 때문에 퍼스트젠틀맨은 없었다.
첫번째 퍼스트레이디는 이승만 전 대통령(초대~3대)의 배우자인 프란체스카 도너 여사다. 오스트리아 출신인 그는 이 전 대통령과 뉴욕에서 만나 결혼했다.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대외 비서 역할을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두번째는 윤보선(4대) 전 대통령의 배우자 공덕귀 여사다. 공 여사는 요코하마 공립 여자신학교를 졸업한 한국 최초의 여성신학자였다. 그는 1년 8개월의 청와대 생활을 ‘귀양살이’라고 할만큼 정치 관여를 최소화했다.
세번째 퍼스트레이디는 박정희 전 대통령(5~9대)의 부인 육영수 여사다. 육 여사는 처음으로 영부인으로 불렸고, 청와대 제2부속실이 신설된 때도 이때다. 육 여사는 한복 차림으로 국민들과 어울리며 박 전 대통령에게 민심을 전하는 역할을 충실히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육 여사가 1974년 총탄을 맞고 사망한 이후에는 장녀인 박근혜 전 대통령이 사실상의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수행했다.
네번째는 최규하 전 대통령(10대)의 부인 홍기 여사였다. 8개월여의 짧은 재임 기간 때문에 대외활동이 많지 않아 홍 여사의 행적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것이 없다.
다섯번째 퍼스트레이디는 전두환 전 대통령(11~12대)의 부인 이순자 여사다. 이 여사는 전 전 대통령 재임 시절 정치와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는 얘기가 돌았다. 당시 저녁 뉴스에 전 전 대통령의 소식을 전하는 ‘땡전 뉴스’에 이어 이 여사 관련 뉴스가 이어지면서 ‘한편 뉴스’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여섯번째는 직선제로 선출된 노태우 전 대통령(13대)의 부인 김옥숙 여사다. 이순자 여사와 달리 공개석상에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일곱번째는 김영삼 전 대통령(14대)의 부인 손명순 여사로, 40년 김 전 대통령의 정치를 조용히 내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손 여사도 공직자 부인이나 국회의원과의 만남을 최대한 자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덟번째는 김대중 전 대통령(15대)의 부인 이희호 여사다. 이화여전(현 이화여대)과 서울대학교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램버스 대학교에서 사회학 학사, 스칼릿 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한 엘리트이자 민주 운동가다. 김 전 대통령이 감옥살이를 할 때는 외신기자들을 만나 한국의 정치상황을 적극적으로 알렸던 김 전 대통령의 동지이자 조언자로 평가받는다.
아홉번째는 노무현 전 대통령(16대)의 부인 권양숙 여사다. 노 전 대통령은 당시 야당이 장인의 좌익 활동을 문제삼자 “이런 아내를 버려야 합니까? 그렇게 하면 대통령 자격이 있고 이 아내를 그대로 사랑하면 대통령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까?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께서 심판해주십시오. 여러분이 그런 아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신다면, 저 대통령 후보 그만 두겠습니다”라는 지금도 회자되는 연설을 했다.
열번째 퍼스트레이디는 이명박 전 대통령(17대)의 부인 김윤옥 여사다. 김 여사는 2012년 내곡동 사저 부지매입과 관련해 대통령 배우자로는 처음으로 검찰의 수사 대상에 올랐다.
열한번째, 현재의 퍼스트레이디는 문재인 대통령(19대)의 부인 김정숙 여사다. 경희대 음대 출신으로, 같은 대학 법대생이었던 문 대통령과 만나 결혼했다.
김 여사는 2012년 대선을 앞둔 그해 8월 『정숙씨, 세상과 바람나다』라는 책을 냈다. 책의 부제는 ‘어쩌면 퍼스트레이디’였다. 김 여사는 책에서 “남편의 뒤에서 꽃만 들고 서 있고 싶지는 않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남편을 도울 생각”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남편이 사람들이 바라는 세상을 여는 ‘문’이라면 나는 그 문의 고리라도, 아니 문이 열릴 때 옆에서 ‘삐거덕’ 소리라도 내는 그런 뭔가 나만의 역할을 찾고 싶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