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선데이 칼럼] 노인이 품위 있게 돈 쓸 수 있는 사회를 꿈꾸며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769호 31면

양선희 대기자

양선희 대기자

지난주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원혜영 전 의원이 이끄는 ‘웰다잉문화운동’과 몇 개 단체가 ‘유언장 쓰기 문화조성 및 유산기부 활성화 캠페인’을 본격화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운동이 새로운 건 아니다. 원 전 의원은 몇 년 전부터 사람만 만나면 존엄한 죽음과 함께 자신의 재산 5~10%를 사회에 환원하는 품위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4년 전 즈음으로 기억하는데, 그는 유산 5~10% 사회 환원이 가능하도록 하는 방법이 무엇이 있겠느냐고 물었다. 재산이라고는 집 한 채밖에 없는데, 마음이 있다고 집 한 채에서 어떻게 5~10%를 쪼갤 수 있다는 말인가. 그는 입법을 통한 상속세 감면 등 여러 가지 방안을 말했다. 여기에 나는 현실적 문제를 더했다. 법이 아니라 자기도 쓰고 사회와도 나눌 수 있는 시스템이 먼저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이건 금융이 해야 할 일 같다고 했다.

집 있어도 생활 빈곤한 은퇴노년기
노인층 자산을 현금화할 수 있도록
국가가 사회적 금융 시스템 도입해
품위 있는 초고령사회 맞게 되기를

말하자면 집 한 채가 재산의 전부인 은퇴기의 노년층이 집을 은행에 담보로 잡히고, 생활 자금과 세금을 융통하면서 여기에 유산 일부의 사회 환원을 약정하는 형태다. 지금도 일정 금액대 이하의 집을 가진 노년층은 역모기지로 생활비를 충당하는 경우가 많으니 이를 확대할 수 있는 입법이 필요하다고 했다. 역모기지를 집값이 얼마 이하인 경우로 한정하지 않고, 금융권에 집을 담보로 제공한 뒤 생전에 충분히 쓰고 사회에 환원할 것은 환원하고, 남은 것은 상속해주면서 상속세 등 세무까지 처리해주는 일을 금융이 맡는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었다. 유산의 사회 환원이 아니더라도 ‘사회적 금융’ 서비스가 필요한 이유는 많다. 한 예로 주택 보유세를 처리하는 문제도 그렇다.

선데이 칼럼 1/1

선데이 칼럼 1/1

최근 정부가 60세 이상의 1가구 1주택 고령자에 대한 종부세 납부 유예 제도를 검토하는 모양이다. 들리는 내용으로는 전년도 소득 3000만원 이하인 사람은 종부세 납부를 유예한 뒤 주택을 팔거나 상속·증여할 때 한꺼번에 받는 방안인 것 같다. 그런데 세금은 매년 들어와야 한다는 세입의 안정성 측면에서 좀 어긋나고, 납세자도 세금을 유예받을 때는 좋지만 한꺼번에 내야 할 때는 나라에 목돈을 떼인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실제로 은퇴 후 30년은 굳이 애쓰지 않아도 산다는 이 시대에 집 한 채 노년층의 삶은 부대낀다. 비싸고 큰 집을 가지고 있어도 ‘유동성’이 없는 삶은 빈곤한 삶이나 다름없어서다. 웬만하면 장수할 수밖에 없는 시대를 살다 보니 덜컥 집을 팔고 현금화해 쓸 수도 없다. 여기에 비싼 동네 비싼 집 한 채가 전부인 은퇴 노인이라면 매년 돌아오는 재산세와 종부세 부담이 공포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하우스 푸어’ 노년층이 “평생 고생해 집 한 채 마련했는데 이젠 세금 때문에 생활이 곤란하다”고 하소연하며 집 보유세에 저항감을 표하는 것도 사회적 책임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런 현실적 곤란 때문일 거다.

나는 집 보유세에 찬성한다. 실제로 전세나 월세살이를 할 경우 계약 갱신 때마다 오른 집값을 충당해야 하고, 그게 안 되면 이사 비용을 들여야 한다. 우리 사회에선 그동안 집 있는 사람들이 늘 운이 좋았다. 종부세 이전엔 세금 부담도 적었고, 게다가 집값은 해마다 올라 자산을 불려줬으니 말이다. 그러니 종부세는 공평한 주거비 부담이라는 차원에서 월세와 전세살이에 부담하는 주거비처럼 집 있는 사람이 부담해야 하는 비용이라고 본다.

다만 지금 종부세의 문제는 그 우악스러움에 있다. 종부세 수준이 가정 경제를 뒤흔들 만큼 엄청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일부엔 분명한 타격을 준다. 특히 은퇴 후 연금으로 생활하는 노년층의 경우는 당장 유동성 고갈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은퇴 노년층 납세자의 비중은 점점 늘어날 거다. 원래 2026년쯤으로 예상됐던 우리나라 초고령사회가 2025년으로 앞당겨질 거란다. 인구 5명 중 한 명이 65세 이상 노인인 초고령사회를 유연하게 넘기 위해서라도 고령층을 위한 사회적 금융 서비스는 서둘러 도입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평생 고생해 마련한 집 한 채로 노년의 생활비와 세금을 충당하고, 사후 일부 재산 환원으로 사회적 책임도 다하고, 그러고도 남은 것은 자녀들이 신경 쓰지 않아도 상속되도록 하는 금융 시스템. 이런 사회적 인프라가 초고령사회를 좀 더 품위 있고 여유 있게 만들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국가적 차원에서도 인구의 20%가 돈을 써줘야 경제도 돌아간다. 돈이 돌아야 우리 자식 세대인 젊은이들도 일을 하고 부가가치를 얻을 수 있다. 어차피 AI와 로봇이 노동하게 될 앞으로의 사회는 기본소득제가 도입되고 사회가 국민의 주거를 책임지는 시대가 될 텐데, 지금 노인 세대가 계속 허리띠를 졸라매고 자식에게 집 한 채 남겨주는 게 큰 의미가 있을까.

새해가 밝았다. 우리는 초고령사회로 한 발 더 다가갔다. 대선의 해를 맞이하는 첫날, 내가 살고 싶은 나라를 생각해보니 ‘노인이 돈 때문에 품위를 잃지 않고, 있는 재산이라도 맘껏 쓸 수 있는 시스템이 완비된 나라’ 였다. 노인의 행복만을 위해서가 아니다. 인구 비중이 높은 노인이 주머니를 열어 다른 인구의 숨통을 터주는 사회. 이런 게 선순환 사회 아닐까.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