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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장훈 칼럼

예고된 재난, 인플레와 버블 공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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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장훈 본사 칼럼니스트·중앙대 교수

장훈 본사 칼럼니스트·중앙대 교수

2년째 코로나에 갇혀 지내다보니, 재난은 대체 어디서 오는가를 곰곰 돌아보게 된다. 당연한 얘기지만 뿌리는 우리 안에 있다. 코로나 위기의 뿌리도 거슬러 올라가보면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만 대하던 자연관(觀)이 도사리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눈앞의 욕망과 승부심으로 또 다른 재난의 불씨를 키우고 있다. 첫째는 세계 곳곳을 강타할 것이 확실한 글로벌 경제 인플레. 둘째는 무책임한 대선 경쟁이 키우는 버블 공약의 정치다.

돈의 가치 추락하는 인플레
말의 가치 추락하는 버블 공약
버블 공약 누구도 제어 안해
솔직함과 용기가 리더의 요건

경제 인플레는 이미 생활세계 곳곳을 휘감고 있기에 우리 대부분이 고통스레 체감중이다. 수도권 부동산 폭등이 가져온 박탈감과 분노는 이미 재난 급이다. 게다가 마트의 식재료 값에서, 줄줄이 예고된 공공요금 인상에서, 솟구치는 글로벌 원자재 가격에서 우리는 인플레 폭풍이 몰려오고 있음을 안다.

얼마 전 미국 연준(FRB)이 인플레 관련 보고에서 일시적(transitory)이라는 표현을 지웠다는 뉴스는 그저 대폭풍 속의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인플레가 몰고 오는 정치태풍을 감지한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농무부, 연방무역위원회까지 총동원하고 있다. 이례적으로 이들 기관이 곡물 회사들의 반독점 행위를 뒤지면서까지 인플레 잡기에 총력전을 벌이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돈의 가치가 추락하는 글로벌 인플레에 더해 지금 우리 대선은 공약의 거대한 버블을 통해 정치 인플레를 만들어내는 중이다. 지난 10여년 역사적 저금리 시대에 무지막지하게 풀린 돈이 경제 인플레의 주요인이라면 정치 인플레는 대선 후보들이 쏟아내는 ‘약속의 홍수’ 때문이다.

세 가지를 짚어보자. ①유독 우리 대선에서 공약 버블이 극심한 이유는 무엇인가? ②공약 인플레는 어떻게 새 대통령의 발목을 잡는가? ③공약 버블-정부 능력약화-정치 불신의 악순환은 누가 끊을 것인가?

첫째, 공약 버블이 한껏 부풀어 오르는 까닭은 우리 정치에서 ‘말의 값’이 저렴하기 때문이다. 감세를 요구하는 계층에게는 감세를, 일자리를 찾는 이들에게는 일자리를, 정부의 지원금을 구하는 이들에게는 지원금 약속이 아낌없이 베풀어지고 있다. 30대 부부 직장인을 위한 맞춤 지원, 20대 취준생을 위한 맞춤 공약, 전국 방방곡곡에서 뿌려지는 다종다양한 지역개발 공약. 약속은 무제한으로 공급되지만 이를 말리는 사람은 없다.

요즘 적지 않게 흔들리고는 있지만, 민주주의를 오래 운영해온 미국, 독일 등은  돈과 말의 가치를 유지하는데 큰 노력을 기울여왔다. 미국, 독일 사람들이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신주 떠받들 듯 하는 데에는 돈의 가치를 조절해 달라는 염원이 담겨 있다. (그들이라고 항상 잘 해내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들 국가들은 또한 대통령후보, 정당들이 내놓는 공약이 저렴하고 무책임하게 유통되는 것을 억제하는 데에도 노력해왔다. 오랜 역사와 전문성을 갖춘 언론과 싱크탱크들은 선거 공약들이 기존 법체계와 충돌하지는 않는지, 예산 확보의 현실성은 어느 정도인지를 정밀히 따져보는 관행을 나름 갖추어왔다.

새해는 민주화 35주년이라지만, 후보들의 말의 값어치를 제대로 제어하는 곳은 우리 사회에 없다. 언론, 전문가, 싱크탱크들은 침묵하거나 후보들의 말잔치를 거들 뿐이다. 양식 있는 관료들은 걱정은 많지만, 입을 열지는 않는다.

둘째, 버블 공약의 1차 피해자는 대통령 후보들 자신이다. 화폐가치가 추락하는 경제 인플레는 자산이 적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계층부터 타격한다. 반면에 버블 공약은 내년 봄에 당선되는 새 대통령의 발목부터 잡는다.

온갖 지원 공약, 개발공약 등이 뿌려졌지만 새해 5월 취임하는 대통령의 주머니에는 기존에 짜여진 2022년도 예산의 절반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유권자들은 공약이 공약(空約)이었음을 또 한번 확인하게 된다. 머지않아 대통령과 유권자들은 서로 등을 돌린다. 결국은 모두가 버블 공약의 피해자가 된다.

그렇다면 버블 공약-대통령 운영능력 추락-정치 불신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는 누가 끊을 것인가? 네거티브로 얼룩진 우리 선거 현실을 돌아보면, 필자의 질문은 한가하게 들릴 것이다. 하지만 한가해 보이지만 근본적인 질문들을 우리가 방치하는 동안 정치는 계속 추락해왔다. 역대 대통령들의 국정운영 능력이 후퇴한 배경에는 버블 공약이 있다. 또한 공약(空約)으로 쌓인 정치 불신이 오늘날 막무가내 정치의 밑거름이 되었다.

새해 아침부터는 화려하고 빈 약속보다는 솔직한 현실인식을 듣고 싶다. 거친 언어보다는 포용의 말을 듣고 싶다. 오래전 민주주의의 생존을 걸고 독일 파시즘과 대전을 벌이던 시기에 수상 직을 맡게 되자, 영국의 처칠은 시민들에게 솔직하게 약속하였다. “저는 피와 수고와 눈물과 땀 외에는 드릴 게 없습니다.” 처칠이 역사 속의 처칠로 등장한 순간이었다.(에릭 라슨, 『폭격기의 달이 뜨면』)

새해에는 선거판의 피투성이 승자보다, 솔직함과 용기를 갖춘 리더가 등장하는 꿈을 꾸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