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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이 ‘창업 최적지’…창업자 10명 중 7명은 후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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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상재 기자 중앙일보 경제산업부디렉터
김경미 기자 중앙일보 기자

R&D 패러독스 극복하자 ⑭ ‘파괴적 혁신’ 필요한 창업 현장

“이제 대학 같은 고등교육기관의 운영 목적은 고급 인재 배출과 좋은 일자리 창출이 돼야 합니다. 대학과 연구소에서 창업은 필수이고, 나아가서는 의무입니다.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이 10~50년 후에 먹고살 거리를 찾아야 합니다.”

중앙일보는 지난 6월 21일부터 탁월한 연구성과를 기반으로 세계 시장에 도전장을 던진 기업인 인터뷰 ‘혁신창업의 길’ 시리즈를 격주로 연재했다. 왼쪽부터 신동윤 페리지에어로스페이스 대표, 양승찬 스타스테크 대표, 천홍석·영석 트위니 공동대표, 조재필 에스엠랩 대표, 박용근 토모큐브 창업자(최고기술책임자), 홍기현 토모큐브 대표, 한동일 압타머사이언스 대표, 고광표 고바이오랩 대표.

중앙일보는 지난 6월 21일부터 탁월한 연구성과를 기반으로 세계 시장에 도전장을 던진 기업인 인터뷰 ‘혁신창업의 길’ 시리즈를 격주로 연재했다. 왼쪽부터 신동윤 페리지에어로스페이스 대표, 양승찬 스타스테크 대표, 천홍석·영석 트위니 공동대표, 조재필 에스엠랩 대표, 박용근 토모큐브 창업자(최고기술책임자), 홍기현 토모큐브 대표, 한동일 압타머사이언스 대표, 고광표 고바이오랩 대표.

정지성 에스오에스랩 대표, 전재영 옴니어스 대표, 이정훈 텔로팜 대표, 박한오 바이오니아 대표, 이병환 스카이랩스 대표, 배준범 필더세임 대표. [중앙포토]

정지성 에스오에스랩 대표, 전재영 옴니어스 대표, 이정훈 텔로팜 대표, 박한오 바이오니아 대표, 이병환 스카이랩스 대표, 배준범 필더세임 대표. [중앙포토]

제어기술 분야의 세계적 석학이자 기술 창업에도 성공한 박용근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가 30일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강조한 말이다. 대학의 역할이 기존 연구·교육 활동을 포함해 ‘창업의 산실’이 돼야 한다는 주문이다. 최근엔 자금 조달 여건이 좋아지고, 외국어에 능통한 MZ세대(1980년~90년대 중반 태어난 젊은 층)가 몰리면서 ‘창업의 최적 조건’을 갖췄다고도 부연했다. 박 교수는 3차원(3D) 홀로그래피 현미경 업체 토모큐브(2015년), 수질측정용 사물인터넷(IoT) 센서 개발업체 더웨이브톡(2016년) 등을 공동 창업한 경험이 있다.

중앙일보-KAIST 103명 설문
가장 큰 장애 ‘지나친 행정규제’
“벤처, 보호 아닌 경쟁속 성장”
정부, 보다 유연해질 필요 있어

대부분 기술사업화 창업 … 정책 지원 필수

하지만 현장에선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반응이 나왔다. 국내 대학·연구원 출신의 창업자 10명 중 6~7명(67%)은 “창업을 후회한 적이 있다”고 토로했다. 중앙일보와 KAIST가 지난달 24일부터 이달 10일까지 대학교수나 정부출연연구소 연구원 신분으로 창업한 기업인(현직 임원) 103명을 설문조사한 결과다. 〈도표 참조〉

기술 사업화 위해 창업 도전했으나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기술 사업화 위해 창업 도전했으나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교수 창업은 최근 들어 상당히 활발해지는 추세다. 한국연구재단에 따르면 교수 창업은 2019년 기준으로 국내 102개 대학에서 281건이 진행됐다. 2015년 76개 대학, 137건이었다가 불과 4년 새 각각 34.2%, 105.1% 늘었다.

김석관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선임연구위원은 “교수나 연구원·의사의 창업은 대개 자신만의 특화한 연구개발(R&D)을 기반으로 한다는 특징이 있어 대표적인 ‘기회형 창업’으로 분류된다”며 “원천기술을 보유해 성공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고 진단했다.

10명 중 6~7명은 후회한 적 있어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10명 중 6~7명은 후회한 적 있어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또 다른 특징은 기술은 유망한데 시장은 아직 움트는 단계에서 도전장을 내는 ‘기술사업화 창업’이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이번 조사에서도 창업 동기를 묻자 자신이 연구하는 분야의 기술을 이전·보급하거나(54.4%), 국가·경제적 기여를 위해서(21.4%)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김석관 선임연구위원은 “이럴 경우 제품화의 불확실성이 문제”라며 “따라서 모험적 자금의 조달이나 정부의 정책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곳곳이 ‘지뢰밭’이다. 무엇보다 정부 정책이 여전히 경직돼 있어서다. 정부가 R&D에 쏟아붓는 투자에 비해 성과는 미미한, 이른바 ‘코리아 R&D패러독스’의 가장 큰 원인으로 10명 중 6명 이상(62.1%·이하 복수응답 가능)이 ‘관료 주도형 사업 기획과 운영’을 꼽았다. 행정 규제가 지나치게 까다롭거나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얘기다.

창업 전후 가장 큰 고민은 ‘사람’.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창업 전후 가장 큰 고민은 ‘사람’.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박용근 교수가 실제로 겪은 사례다. “고가의 계측 장비를 사놓고 포장도 풀지 않은 채 복도에 세워놓고 있는 스타트업에 방문한 적이 있다. 최근 국정감사에서 ‘연구가 아닌 엉뚱한 곳에 돈을 쓴다’는 지적이 나오자마자 ‘1억원 이상 장비를 구매하려면 별도의 심사위원회를 통과해야 한다’는 규정이 생겼다고 한다.” 이럴 땐 심사위원회에서는 으레 ‘이 장비를 반드시 사야 하느냐’ ‘구매 방법이 뭐냐’ 같은 질문이 나오기 마련이다. 박 교수는 “당사자 입장에서는 모멸감을 받기도 한다. 교수 출신들은 ‘이럴 바에 차라리 사지 않거나 사용하지 않고 말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며 “정책이 보다 융통성을 발휘해야 한다”고 말했다.

“출장 예정 횟수 적어내라” 과도한 서류 여전  

과도한 서류 요구도 고쳐지지 않았다. 정부 연구 과제를 맡았을 때는 매년 20~50쪽 분량의 계획·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연구원의 학력과 월급, 컴퓨터 등 기자재 구매 계획과 출장 예정 횟수까지 첨부해야 한다. 익명을 원한 과학기술계 인사 A씨는 “정부 과제는 지원분야에 따라 50쪽, 또는 100쪽으로 분량을 사전에 정해두고 있다”며 “사정이 이렇다 보니 20~30쪽이면 충분한 내용을 부풀리거나 억지로 꿰맞추게 되는 경향이 있다”고 털어놨다.

행정 중심주의가 ‘R&D 패러독스’ 원인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행정 중심주의가 ‘R&D 패러독스’ 원인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이번 설문조사에서 응답자들은 ‘3책5공 규정’이 가장 비현실적인 규정이라고 지적했다. 연구자 한 명이 책임지는 과제가 3개를 넘지 못하고, 동시 수행하는 과제도 5개로 제한한다는 내용이다. 특정 대학 연구팀이 정부 과제를 독식하지 못 하게 하자는 취지에서 도입됐다. 김민정 KAIST 교수는 “연구자를 초등학생 다루듯 연구 범위를 제한하고, 일일이 간섭하는 대표 사례”라며 “연구자가 스스로 관련 과제를 확장해갈 수 있어야 하는데 이 같은 규정이 발목을 잡고 있다”고 꼬집었다.

“연구는 안 하냐” … 보수적 문화도 걸림돌

정부는 ‘자율’ 쪽으로 정책 전환해야.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정부는 ‘자율’ 쪽으로 정책 전환해야.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겉으로는 기술 창업을 독려하지만 ‘유행’만 좇는 관료 문화에 대해서도 쓴 소리가 나왔다. 국책연구소 출신으로 창업한 B씨는 “정부 과제는 연구 제안서에 급부상한 신기술 키워드를 슬쩍 끼워 넣으면 쉽게 통과된다는 게 정설”이라며 “가령 요즘은 메타버스(가상+현실세계)나 인공지능(AI)으로 ‘화장’을 하면 어렵지 않게 낙점받을 수 있다”고 귀띔했다.

거꾸로 한 분야에 몰입하는 프로젝트는 쓴맛을 보기도 한다. 자신이 연구하던 주제와 연장선에 있는 분야는 되레 탈락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김민정 교수는 “이러면 그 분야를 선도·확장할 기회를 사장하는 셈”이라며 “연구자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해줘야 지원 효과가 커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경환 성균관대 창업대학원장은 “정부가 신산업이 태동·발전할 때 뒷북을 치는 경향이 있다”며 “관련 부처가 변화에 기민하게 대처해야 하는데, 기업이 목청을 높여야 뒤늦게 개선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대학과 연구소의 일하는 문화가 창업에 ‘브레이크’를 건다는 견해도 나왔다. 박용근 교수는 “창업을 할 때마다 주변으로부터 ‘왜 연구는 안 하느냐’는 질타를 받았다. 심지어 학생들의 반응도 부정적일 때가 있다”고 털어놨다. 이어 “(학생들이) ‘연구자들은 가난해야 하는데, 왜 돈 얘기를 꺼내느냐’고 한다. 이럴 땐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중에 창업자가 얼마나 많은 줄 아느냐’고 자극하고 동기를 부여한다”고 덧붙였다.

창업 전문가들은 “파격을 넘어 파괴가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고급 두뇌와 기술 아이템이 만나면 자연스럽게 창업과 연결되도록 물길을 열어줘야 한다는 얘기다.

“스톡옵션, 인사제도 대폭 손봐야”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숙제는 ‘사람’이다. 이번 조사에서 응답자들은 창업 과정(29.1%)과 창업 이후(68.0%)에 전문 인력의 조달·조력이 가장 어렵다고 호소했다. 대기업 취업을 선호하는 분위기가 워낙 강해서다.

고급 두뇌를 유치하기 위해선 스톡옵션(주식매수권) 제도를 대폭 손봐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정규 브릿지바이오테라퓨틱스 대표는 “현재 스톡옵션 부여 대상이 임직원이나 주요 자격증 소지자 등으로 제한돼 있다”며 “이를 실제 회사 성장에 기여한 사람으로 범위를 넓히고, 현행 6~42%인 세율도 조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유의 안정 지향적인 조직 문화를 깨뜨리려면 ‘메기’를 풀어놔야 한다는 제언도 있다. 대표적인 게 인사 시스템 혁신이다. 박용근 교수는 “신임 교수들은 테뉴어(정년보장) 심사를 통과한 다음에 창업하고 싶어하는 심리가 있다”며 “그것보다는 기술 이전과 창업 실적을 승진과 평가에 적극적으로 연동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산업구조가 급변하는 만큼 정부에 대해서는 보다 유연해질 것을 주문했다. 중앙일보 ‘R&D 패러독스 극복하자’ 기획 연재의 자문위원인 이정동 서울대 교수는 “눈에 보이는 지원책보다 환경 정비가 우선”이라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이어 “벤처는 보호가 아니라 경쟁 속에서 자라는 것”이라며 “정부는 소프트웨어·애플리케이션 등 ‘가벼운 창업’은 경쟁을 유도하고, 핵심 제조기업이 탄생할 수 있는 ‘무거운 창업’에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 그러면서 창업 환경 정비에 집중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코리아 R&D패러독스

정부가 투입하는 연구개발비는 89조원(2019년)이다. 연구개발(R&D) 투자 규모로 치면 국내총생산 대비 세계 2위, 특허 신청 세계 4위로 매우 높지만 경제적 성과, 기술 사업화, 일자리 창출 등이 저조한 현상을 일컫는다. 연구 자율성 확대와 창업 활성화, 정책구조 혁신 등을 통해 극복해야 한다는 제언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