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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문소영의 문화가 암시하는 사회

‘눈먼 자들의 나라’에선 눈뜬 사람이 바보일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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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해시태그 진실’의 유행

H G 웰스의 단편소설 ‘눈먼 자들의 나라’(1904) 초판에 실린 삽화들. 클로드 세퍼슨의 작품이다. [사진 위키미디어 커먼스]

H G 웰스의 단편소설 ‘눈먼 자들의 나라’(1904) 초판에 실린 삽화들. 클로드 세퍼슨의 작품이다. [사진 위키미디어 커먼스]

요즘 넷플릭스에서 화제인 할리우드 영화 ‘돈 룩 업(Don’t Look Up)’은 SF 블랙코미디다. 6개월 후 지구와 충돌해 인류 멸망을 가져올 혜성이 날아오고 있다는 것을 과학자들이 발견한다. 하지만 미디어는 이걸 센세이셔널한 연예뉴스처럼 다루고, 천문학 전문가들은 희화화된다. 대통령은 이걸 어떻게 지지율과 연결할지에만 골몰하고, 선지자처럼 구는 거대 IT기업 CEO는 혜성에 엄청난 광물자원이 있으니, 혜성을 폭파하는 대신 쪼개서 지구 바다에 떨어뜨리자는 위험한 도박을 제안한다.

곧 사람들은 둘로 쪼개진다. 눈을 들어(룩 업) 혜성을 보고 그 위험을 알리자는 부류와 올려다보지 말고(돈 룩 업) 엄청난 부를 챙기자는 양측으로 나뉘어 소셜미디어 해시태그 전쟁을 벌인다. 반면 과학자들은 뒷전으로 밀린다. 주인공 과학자들이 시작한 ‘룩 업’ 운동조차 ‘갬성 운동’으로 전락해서 톱스타 가수의 ‘저스트 룩 업’ 노래와 콘서트만 히트할 뿐 실질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영화 ‘돈 룩 업’의 초라한 과학자들
TV토크쇼 농담이 영향력 더 강해
한 줄로 설명 안 되면 사람들 외면
SF거장 웰스의 경고 새겨 들어야

인터넷에 널린 파편적 지식

워낙 풍자 포인트가 많은 영화인데, 특히 전문지식이 가장 긴박한 상황에서 전문가가 무시되는 대목은 톰 니콜스의 2017년 저서 『전문가와 강적들(원제 The Death of Expertise)』을 연상시킨다. 러시아 전문가인 니콜스 미국 해군대 교수는 인터넷에서 모은 파편적인 정보로 오히려 자기를 가르치려 드는 비전문가들 때문에 어이가 없어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전문가들의 복잡한 설명은 외면 받고(진실이 복잡하면 복잡하게 설명할 수밖에 없건만), 인기 셀럽이나 소셜미디어 집단지성에 의해 단문으로 요약돼서 해시태그 달기 좋은 ‘진실’이 더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H G 웰스의 단편소설 ‘눈먼 자들의 나라’(1904) 초판에 실린 삽화들. 클로드 세퍼슨의 작품이다. [사진 위키미디어 커먼스]

H G 웰스의 단편소설 ‘눈먼 자들의 나라’(1904) 초판에 실린 삽화들. 클로드 세퍼슨의 작품이다. [사진 위키미디어 커먼스]

일종의 우화인 영국 소설가 H G 웰스(1866~1946)의 단편 ‘눈먼 자들의 나라’(1904)에서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웰스는 무려 120여 년 전에 ‘타임머신’이란 말을 탄생시켰고 지금까지 영화화한 『우주전쟁』 『투명인간』 등을 쓴 SF 거장인데, 그의 천재적인 상상력은 이 단편소설에서도 빛을 발한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누네스라는 이름을 가진 남미의 등산가 청년이 조난을 당해서 가파른 절벽으로 둘러싸인 외딴 골짜기에 이르게 된다. 그곳에는 창문 없는 집들과 거미줄처럼 뻗은 길들이 있는 이상한 마을이 있는데, 알고 보니 이곳 사람들은 모두 날 때부터 눈이 멀어있다. 수백 년 전 여기 정착한 그들의 조상은 눈이 정상적으로 보였지만, 기이한 질병이 퍼지고 산사태로 외부와 완전히 고립된 후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눈먼 부족이 된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시각 대신 발달한 청각·후각 등으로 풍요로운 자연을 잘 활용해서 별문제 없이 살고 있다.

누네스는 ‘맹인의 나라에선 외눈만 있어도 왕이다’라는 경구를 떠올리며 눈이 보이는 자신이 그들을 가르치고 다스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아예 ‘본다’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누네스가 미친 소리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식이다.

"눈먼 남자가 말했다. ‘왜 내가 불렀을 때 안 왔어요? 어린애처럼 손잡아 끌어줘야 해요? 걸을 때 길 밟히는 소리로 길 따라 걷는 거 못해요?’누네스는 웃었다. ‘난 길을 봅니다!’잠시 가만 있다가 눈먼 남자가 말했다. ‘봅니다라는 단어는 없어요. 바보 같은 소리 그만두고 내 발자국 소리 따라와요.’ (…) 그들은 계곡을 둘러싼 절벽 바위가 세상의 끝이고 그 위로 동굴 천장 같은 우주의 지붕이 솟아있다고 믿었다. 누네스가 그들의 생각과 달리 이 세상은 끝도 없고 지붕도 없다고 고집스럽게 말하자 그들은 그 생각이 요사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하늘과 구름과 별을 최대한 멋지게 묘사하려고 애썼지만 사람들은 지붕이 없다면 끔찍한 허공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설명을 포기한 누네스는 이번에는 눈이 보여야만 할 수 있는 일들로 우월한 능력을 보여주려 하지만 마을 구조 자체가 몇 세기를 거치며 눈먼 사람들에게 최적화했기 때문에 오히려 실수만 연발하고 사람들에게 바보 취급을 넘어서서 뇌에 장애가 있는 취급을 받는다. 결국 그는 골짜기 밖으로 나가는 것도 불가능해 보여서 모든 걸 포기하고 눈먼 부족에 순응해서 살아간다.

그러다 누네스는 한 마을 처녀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고 싶어하는데, 마을 장로들이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환각에 고통받고 정신이 불안정한 자여서 안 된다”며 반대한다. 그러자 부족의 의사가 그의 모든 문제는 얼굴에 움푹 들어간 부위(눈) 때문이라며 그 부분만 제거하면 그도 정상이 될 것이라고 한다! 눈 제거 수술을 받자는 말을 듣고 누네스는 처음엔 펄쩍 뛰지만 사랑하는 여인을 포기할 수 없어서 결국 승낙하고 만다.

마침내 수술 당일, 누네스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아침 해가 떠오르는 것을 바라본다. 햇빛이 절벽을 타고 퍼지는 것을, ‘황금갑옷을 입은 천사 같은 아침’을 보며 그 ‘무한한 아름다움’을 포기할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그는 그대로 절벽을 기어올라 골짜기를 빠져나간다-무사히 산을 탈출할지 산중에서 죽을지 알 수 없지만 광대한 하늘을 볼 수 있다는 기쁨으로.

이 시대에 대한 거대한 우화

영화 ‘돈 룩 업’의 한 장면. 천문학자로 나오는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오른쪽에서 둘째)와 제니퍼 로렌스(맨 오른쪽)는 TV쇼에 출연해 지구에 닥칠 재앙을 알리지만 그들의 경고는 무시되고 만다. [사진 넷플릭스]

영화 ‘돈 룩 업’의 한 장면. 천문학자로 나오는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오른쪽에서 둘째)와 제니퍼 로렌스(맨 오른쪽)는 TV쇼에 출연해 지구에 닥칠 재앙을 알리지만 그들의 경고는 무시되고 만다. [사진 넷플릭스]

언론인·소설가 이탈로 칼비노(1923~1985)가 “위대한 도덕적·정치적 우화”라고 평한 것처럼, 이 단편은 다양한 사회 문제에 대한 풍부한 상징을 품고 있다. 어떤 이들은 누네스에게서 자기 문화의 우월성을 맹신하며 식민지에 강제 주입하려 하는 제국주의자의 모습을 읽는다. 반대로 어떤 이들은 눈먼 부족을 보며 멀쩡한 사람을 바보로 만들고 그의 특이한 부분을 제거하려 하는 집단주의의 무서움을 읽기도 한다.

확실히 주인공 누네스는 소설 초반에 건방지게 묘사된다. 우월감을 갖고 눈먼 부족을 대하며 당연히 자신이 그들의 지도자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 하지만 보이는 자의 편견과 달리 눈먼 자들은 잘만 살고 있고, 보이는 자의 우월함을 증명하려는 시도는 우스꽝스럽게 실패한다. 하지만 소설 후반으로 갈수록, 이번에는 누네스를 열등하고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몰아가는 마을 사람들이 두렵게 느껴진다. 물리적 폭력 없이 진심으로 염려하는 듯한 가스라이팅이라서 오히려 더 무섭다. 특히 눈 제거 수술을 하자고 할 때 공포는 최고조에 달한다. 과연 칼비노의 말대로 “스스로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주장의 상대성을 성찰하게 하는” 단편소설이다.

하지만 이 소설이 철저히 상대성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건 아니다. 누네스가 말하는 대로 하늘과 구름과 별이 있고 절벽 바깥에 다른 세상과 도시가 있다는 것은 절대적 진실이다. 웰스가 1939년 내놓은 이 소설의 개정·확장판을 보면 누네스는 막판에 먼산을 바라보다가 산사태가 닥치리라는 점을 알아차리고 마을 사람들에게 알린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가 “보았다”는 것을 비웃으며 믿지 않는다. 결국 산사태가 나고, 누네스는 사랑하던 여인을 구해 골짜기를 탈출한다. 여기서 누네스는 영화 ‘돈 룩 업’에서 재앙을 예고하는 과학자들과 비슷해진다. 즉 누네스와 눈먼 부족의 관계를 현대의 전문가와 대중의 관계에 대입해서 볼 수 있다.

우리는 어떤 한 영역에선 전문가일 수 있으나 그 외 영역에서는 무지한 대중이다. 우리가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 그 분야 전문가가 낯선 용어를 쓰며 설명할 때, 우리는 마치 누네스로부터 시각(視覺)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을 듣는 눈먼 부족 같은 기분이 된다. 그 설명은 결코 직관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시각기관이 없는 부족이 어떻게 직관적으로 시각이 뭔지 이해하겠는가. 열린 마음으로 참을성 있게 설명을 들으며 논리적 추론과 상상력을 총동원해야 이해할까 말까 한 것이다.

전문가와 대중의 소통법 없나

하지만 우리 대다수는 이것을 귀찮아한다. 한 줄로 요약 가능하며, 직관적으로 이해 가능한 설명을 요구한다. 게다가 우리가 듣기에 기분이 좋아야 한다. 누네스처럼 내가 못 보고 모르는 것을 보고 안다며 잘난 척하는 전문가들은 재수가 없다고 한다. 게다가 니콜스가 『전문가와 강적들』에서 지적한 것처럼, 현대에는 손쉽게 닿을 수 있는 정보가 인터넷에 가득하다. 정보 퀄리티는 전혀 검증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니콜스는 민주주의와 평등이 중요하지만 그게 모든 정보의 퀄리티가 평등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라고 지적한다. 또 언론이 정보의 홍수와 경쟁 속에서 독자들에게 필요한 것 대신 입맛에 맞고 팔릴 만한 뉴스만 생산한다고 비판한다. 신문에 몸담은 필자도 뜨끔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니콜스는 책 말미에서 이렇게 조언한다. 전문가들은 선민의식을 가지지 말고 사회에 봉사하는 자로서 대중이 자신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인내심을 갖고 봉사를 멈추지 말라고. 그리고 대중은 전문가에 대한 적의를 내려놓고 열린 마음을 가지라고. 만약 누네스가 우월감을 갖지 않고 눈먼 부족을 존중하며 서서히 자신이 시각으로서 얻은 지식을 전파했다면, 그리고 눈먼 부족도 열린 마음으로 누네스의 말을 이해하고 존중하려 애썼다면 그들은 함께 산사태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