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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파는 '백수의 왕' 사자…힘든 인생, 유머로 그린 스즈키 노리타케

중앙일보

입력 2021.12.30 06:00

업데이트 2022.03.02 15:24

한 줄 평 :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부러워 보이는 어떤 이의 삶도 그에겐 비극이리라.
함께 읽어보면 좋을 스즈키 노리타케의 다른 그림책
『캄캄한 밤이 오면』 깜깜한 밤, 우체통이 걸어 다니고 길 잃은 공룡이 운다. 자기 싫어 하는 아이와 잠자리에서 읽어보면 좋을 그림책.
『케찹맨』일이란 뭘까? 내가 진짜 좋아하는 일은? 정답 같은 길을 벗어나 꿈을 찾아가는 케찹맨이 어른을 위로한다.
『어떤 목욕탕이 좋아?』 화장실에 이어 목욕탕, 이불 등을 소재로 상상력을 끝까지 밀어 붙인 노리타케의 상상력.
추천 연령 : 유치원에 다니는 5~7세 어린이부터 아직 그림책을 즐겨 보는 초등학교 1,2학년 어린이에게 추천합니다. 손가락으로 그림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숨은 캐릭터를 찾아보세요, 반드시!
(※그림책은 아이부터 어른까지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추천 연령은 서사의 구조나 주제 등을 고려하여 제안하는 참고 사항일 뿐 권장 사항이 아닙니다.)
『천만의 말씀』엔 강하고, 멋지고, 대단한 동물들이 줄줄이 나온다. 하지만 어느 하나 우스꽝스럽지 않은 동물이 없다.

『천만의 말씀』엔 강하고, 멋지고, 대단한 동물들이 줄줄이 나온다. 하지만 어느 하나 우스꽝스럽지 않은 동물이 없다.

여기 사자 한 마리가 불룩 나온 배를 늘어뜨리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코를 파고 있습니다. 도무지 동물의 왕다운 품위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가늘고 긴 목과 다리를 가진 우아한 기린, 정작 너무 길어 얼굴만 굴뚝 밖으로 내밀고 살아야 한다. 덕분에 검댕이 묻어 얼굴이 검디 검다.

가늘고 긴 목과 다리를 가진 우아한 기린, 정작 너무 길어 얼굴만 굴뚝 밖으로 내밀고 살아야 한다. 덕분에 검댕이 묻어 얼굴이 검디 검다.

기린은 또 어떤가요? 길고 가는 목과 다리를 가진 우아하고 도도한 기린이 새까매진 머리를 굴뚝 밖으로 내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앞다리(팔)가 얼굴에 안 닿아 세면대에서 세수조차 할 수 없습니다.

스즈키 노리타케의 『천만의 말씀』엔 강하고, 멋있고, 우아한 동물들이 줄줄이 나옵니다. 시작은 한 꼬마입니다. 특별한 점이라곤 없는,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그저 보통 아이라는 이 꼬마는 코뿔소를 부러워합니다. 갑옷 같은 멋진 가죽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코뿔소는 그 가죽이 거추장스러울 뿐입니다. 가볍게 깡충깡충 뛰는 토끼가 부럽죠. 그런데 토끼는 아무 때나 깡충깡충 뛰는 일엔 넌덜머리가 났습니다. 커다란 몸으로 바닷속을 스르륵 헤엄치는 고래가 부러울 따름이죠. 네, 맞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고래는 기린을, 기린은 새를, 새는 사자를 부러워하고, 부러움의 종착지인 사자는 목숨 걸고 달아나는 먹잇감을 쫓아가는 일은 너무 힘들다며 슬슬 책이나 읽으면서 뒹굴뒹굴하는 인간 아이를 부러워하죠.

어디서 많이 보던 모습 아닌가요? 유치한 아이의, 우매한 동물들 얘기가 아닙니다. 사실 우리(어른) 얘기죠. 누구나 자신은 비극을 살면서, 타인의 희극을 봅니다. 그리고 원망하죠. 나 빼고 다 행복하다고요. 또 부러워합니다. 전생에 무슨 복을 지어 저렇게 잘 사느냐고 말입니다. 하지만 인생은 원래 그런 겁니다. 찰리 채플린의 말대로,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니까요. 가까이 있는 내 삶은 언제나 비극이고, 멀리 있는 타인의 삶은 늘 희극일 수밖에 없습니다. 온갖 잘나가는 동물들이 결국 별 볼 일 없는 인간 아이를, 부러운 대상 찾기 릴레이의 시작점인 인간 아이를 부러워하는 건 그래서죠.

얼굴에 검댕이 묻었지만, 기린은 자기 얼굴조차 직접 씻을 수 없다. 목이 너무 길어 슬픈 기린은 고래를 부러워한다.

얼굴에 검댕이 묻었지만, 기린은 자기 얼굴조차 직접 씻을 수 없다. 목이 너무 길어 슬픈 기린은 고래를 부러워한다.

스즈키 노리타케는 무겁고 진지하기 짝이 없는 인생의 진리를 세상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세상 재미있게 그려냅니다. 배 내밀고 코를 파는 사자의 얼굴을 하고, 내 앞에 주어진 이 비극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유머뿐이라는 듯이요.

생각해보면, 노리타케의 말이 틀린 게 없습니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고된 법입니다. 일본의 에도 막부를 열어젖힌, 일본 최고 영웅으로 칭송받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마저 “인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이라고 일갈했을 정도죠. 그런 인생의 무게를 특별할 것 없는 인간이 감당해내려면, 눈앞에 닥친 문제를 별거 아니라고 웃어넘길 수 있어야 하니까요. 유머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필요한 무기인지 모릅니다. 노리타케의 그림책이 유머와 재치로 무장한 건 그래서겠죠.

똥 이야기, 화장실 이야기를 싫어하는 아이는 없다. 그 화장실로 스즈키 노리타케는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낸다.

똥 이야기, 화장실 이야기를 싫어하는 아이는 없다. 그 화장실로 스즈키 노리타케는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낸다.

『어떤 화장실이 좋아?』 역시 그의 유머 감각이 200% 발휘된 책입니다. 누구나 매일 대여섯번도 넘게 가는 화장실, 좀 특별할 순 없을까요? 이 책은 조금 엉뚱한 이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주인공 어린이는 롤러코스터 화장실을 원하죠. 바라던 그 화장실 문을 열었더니 웬걸, 변기가 없습니다. 롤러코스터 화장실을 타고 싶었던 고릴라가 타고 달아나버렸거든요. 빼앗긴 변기를 찾는 어린이의 모험을 따라가다 보면 환상의 화장실 세계가 펼쳐집니다.

스즈키 노리타케는 하나의 큰 그림을 세세한 그림으로 채워 넣는 화법을 구사한다. 그의 그림은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하나하나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재미가 있다.

스즈키 노리타케는 하나의 큰 그림을 세세한 그림으로 채워 넣는 화법을 구사한다. 그의 그림은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하나하나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재미가 있다.

노리타케는 미장센이 뛰어난 작가입니다. 그의 그림은 하나의 세계입니다. 그 세계 안에는 작은 세계가 가득하죠. 그가 만든 세계를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짚어가며 탐험하는 게 그의 그림책을 보는 재미입니다. 노리타케 역시 자신의 세계 속에 크고 작은 캐릭터를 숨겨놓고 찾아보라고 하죠.

앞서 소개한 일본의 그림책 작가 요시타케 신스케, 기억나시나요? 요시타케 신스케의 그림책 배경은 대부분 집이거나 넓어 봐야 학교에서 집에 오는 길입니다. 동네를 잘 벗어나지 않죠. 그 점에선 스즈키 노리타케도 비슷합니다. 하지만 요시타케 신스케의 상상력이 안으로 뻗어 있다면, 스즈키 노리타케의 상상력은 밖으로 뻗습니다. 이야기는 집 안에서 시작해 동네를 벗어나지 않는데, 책을 덮고 나면 엄청나게 큰 세계를 여행하고 온 기분이 들거든요. 아이와 함께 두 작가의 그림책을 나란히 놓고 이야기를 나눠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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