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진중권 칼럼

진중권 "설강화가 문제? 그럼 '쉰들러 리스트'는 나치 미화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설강화’를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이 드라마가 군부독재를 미화하고 민주화운동을 모독했다는 것이다. 누군가 청와대에 드라마의 방영중단을 요구하는 국민청원을 올렸고, 20만 명이 넘는 이들이 거기에 서명을 했다. 그것으로 모자랐는지 이 드라마가 ‘반헌법적’이라는 청원까지 올라왔다.

이를 말려야 할 정의당의 심상정 후보까지 거들고 나섰다. “운동권에 잠입한 간첩, 정의로운 안기부, 시대적 고민 없는 대학생, 마피아 대부처럼 묘사되는 유사 전두환이 등장하는 드라마에 문제의식을 못 느낀다면 오히려 문제다.” 대체 그런 설정에 왜 문제의식을 느껴야 하는 것일까? 운동권에 간첩이 잠입했다고 설정하면 안 되는가? 극히 일부지만 1980년대 운동권이 간첩과 접촉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짓 하다가 전향한 이들까지 있다. 하지만 간첩 몇몇이 끼어 있었다고 민주화운동 자체가 북한의 지령이 되는가? 그거야말로 당시 보안사와 안기부의 논리 아닌가.

‘설강화’ 공격은 운동권의 시대착오
민주화에 간첩잠입 설정 왜 안되나
안기부 1명 정의로우면 미화인가
상투적 세계관으로 창작억압 안돼

안기부 요원 딱 한 명을 정의로운 인물로 설정한 것이 안기부라는 기관 자체를 미화한 것인가? 그런 논리라면 영화 ‘피아니스트’와 ‘쉰들러 리스트’는 나치 집단 전체를 미화한 극악한 영화라 비난받아야 할 것이다. 현실로도 존재할 수 있는 일이 왜 드라마로 존재해서는 안 되는 걸까? “시대적 고민 없는 대학생”이란다. 그런데 내 기억에 따르면 학생운동이 절정에 달했던 80년대에도 캠퍼스에서 다수를 점한 것은 그 시절 운동권이 “시대적 고민 없는 대학생”이라고 비난했던 이들이다. 80년대 대학생은 무조건 ‘시대적 고민’을 하는 인물이어야 하는가? 그거야말로 현실 왜곡이다.

이 소통의 바탕에는 독특한 미학이 깔려 있다. 소설 속의 ‘개인’은 이른바 ‘전형’, 즉 한 ‘집단’의 표상이어야 한다는 관념. 바로 80년대 운동권의 사회주의 리얼리즘론이다. 결국 그 낡은 미학에 따라 한 ‘개인’을 한 ‘집단’의 표상으로 간주하다 보니 21세기에 이런 시대착오가 벌어지는 것이다.

‘전형론’의 고질적 문제는 문학적 형상의 묘사를 상투화한다는 데에 있다. 즉, 안기부 요원들은 모두 사악하고, 운동권은 언제나 순결하고, 80년대 대학생은 누구나 ‘시대적 고민’을 하는 존재로 묘사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전형에서 벗어난 묘사를 했다가는 곧바로 ‘반동’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1930년대에 독일의 화가 그로스. 그도 노동자를 영웅적 ‘전형’에서 벗어나게 묘사했다고 ‘프티부르주아 반동’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동지들은 내가 노동자를 묘사하는 방식에 반대한다. 나의 프롤레타리아가 진짜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프티부르주아가 빚은 인공적 형상이라는 것이다.” 리얼리즘도 하나의 미학이니 그것을 비평의 기준으로 삼는 것을 탓할 일은 아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것이 그저 ‘하나’의 미학이라는 사실이다. 그 ‘하나’ 외에도 드라마를 보는 다양한 시각들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런데 저들은 자기들의 낡은 미학만이 유일하게 옳은 시각이라 강변한다.

여기까지도 참아줄 수 있다. 문제는 이들이 집단의 위력으로 그 낡은 관념을 강요하는 데에 있다. 기업들을 압박해 광고를 끊고, 방송사를 공격해 방영 중단을 요구한다. 그저 그들만큼 머리가 나쁘지 않다는 이유에서 졸지에 드라마 볼 기회를 빼앗긴 다른 시청자들의 권리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이런 일이 반복되면 창작자들은 자기검열을 강화할 수밖에 없고, 이는 미학적으로 치명적 결과를 낳게 된다. 심상정 후보의 말을 들어보자. “엄혹한 시대에 빛을 비추겠다면, 그 주인공은 안기부와 남파간첩이 아니라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위해 피와 땀, 눈물을 흘렸던 우리 평범한 시민들이 돼야 한다.”

한 마디로 ‘오직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인민대중(“우리 평범한 시민들”)만이 이런 드라마의 문학적 영웅이 될 자격이 있다’는 얘기. 이런 종류의 지침에 따르다 보면 북한에서나 만들 법한, 뻔한 설정의 상투적 작품들만 나오게 된다. 이게 창작을 얼마나 질식시킬지 굳이 말해야 하는가.

리얼리즘의 역설은 실은 ‘리얼’과는 아무 관계 없다는 것. 그로스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내가 그리는 것과 다른 프롤레타리아를 상상할 수 없다. 나는 그들이 사회의 밑바닥에서 저임금에 시달리고, 냄새 나는 집에서 살며 때로는 ‘정상에 오르라’는 부르주아적 욕망에 지배당한다고 본다.”

이게 ‘리얼’ 프롤레타리아트다. 심 후보가 말한 “우리의 평범한 시민들”도 6·10항쟁 바로 전날까지는 ‘학생들이 공부는 안 하고 데모만 한다’고 욕을 했었다. ‘리얼’ 대중은 용감한 혁명가이면서 동시에 비겁한 기회주의자다. 상투형으로 전형화하기에 인간은, 그리고 세상은 너무나 복잡하다.

자신의 상투적 세계관으로 창작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 그거야말로 민주화운동이 추구하던 가치의 배반이다. 자신의 교조적 관념으로 상상의 영역마저 통제하려 드는 자들. 이 이념 깡패들이야말로 열린 사회의 적들이다. 민주화운동은 우상이 아니다. 그것을 남조선 수령으로 만들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