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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상언의 시시각각

고쳐 쓸 수 없는 공수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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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어릴 때는 언제나 박정희 대통령이 대통령이었어요. 아홉 살 때부터 스물일곱 살 때까지. 저는 사실 뭐 대단한 운동가도 아니었고 잡혀간 적도 없었어요. 그런데 데모가 있고 나면 꿈을 꿔요. 대학로 쪽의 교문이 막혀 후문으로 도망가면 후문이 막히고, 또 옆으로 담장을 넘어가려면 경찰이 지키고 있어요. 끊임없는 공포를 느끼지요. (중략) 본과 3학년 때 정신과 실습을 돌았는데 환자의 상당수가 피해망상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 대상이 중앙정보부였어요. 중앙정보부에서 나를 미행한다, 중앙정보부가 나를 쫓아다닌다. 그것이 공포심의 근원이었어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건 정체 모를 조직에 쫓기는 겁니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가?”

2016년 2월 26일 휠체어에 앉은 김용익 당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회 본회의장 단상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당의 ‘테러방지법’ 필리버스터 4일째 일입니다. 9일간 이어진 야당 의원들의 연설에는 주옥같은 말이 많았습니다.

영장 없는 정보 수집 비난했던 여당
공수처 마구잡이 통신 조회엔 침묵
헌법 유린한 공수처는 문을 닫아야

“왜 국민이 자신들의 보안 문제를 걱정해야 합니까? 그걸 걱정해야 하는 게 국가이지 않습니까? 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중략) 평범한 삶을 사는 내가, 내 이웃이, 그리고 내 부모가, 내 자식이 국가기관에 의해 정보를 수집당하고 스마트폰을 뒤짐당하더라도 상관없습니까? 우리의 인권은, 우리의 존엄성은, 우리의 사생활은 상관없는 것입니까?” 배재정 전 의원의 연설 한 대목입니다.

5일 차에 나선 정청래 의원은 “정권은 짧고, 국민은 영원하다”고 일갈했습니다. 진선미 의원은 “공권력은 오직 국민을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192시간 필리버스터의 마지막 주자였던 이종걸 의원은 “우리 할아버지가 세우려고 했던 나라는 이런 나라가 아니다”고 탄식했습니다. 그의 조부는 독립운동가 이회영 선생입니다.

당시 야당이 테러방지법에 결사반대했던 것은 국가정보원이 ‘위험인물’에 대한 통신 내역 등의 개인정보를 법원이 발부한 영장 없이도 수집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9일의 필리버스터 과정에서 대한민국 헌법이 반복적으로 거론됐습니다.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17조). 모든 국민이 통신의 비밀을 침해받지 아니한다(18조).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37조 2항의 끝부분). 이렇게 준엄하게 쓰여 있습니다.

이랬던 당시 야당, 현재의 여당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의 기자, 정치인, 시민단체 간부 통신 자료 조회에 대해 말이 없습니다. 여당에는 청년 시절 수사기관에 쫓기는 신세가 돼 가족이나 애인에게 전화 한 통 하지 못했던 ‘운동권 출신’이 많습니다. 짧은 통화 하나가 자신·가족·친구에게 어떤 비극을 부를지 너무 잘 알기에 공중전화 수화기를 들었다가 바로 내려놓은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야만의 시대에서 벗어나자고 청춘들이 몸부림쳤고, 지금은 민주화라는 위대한 과업을 이뤘다고 그들이 자부하고 있습니다.

20개 넘는 언론사의 140명 이상 기자가 통신 자료 조회를 당했습니다. 몇몇 기자의 가족도 당했습니다. 국민의힘 의원의 70%가 대상이 됐습니다. 숫자는 계속 불어납니다. 기자들은 이제 고위 공직자 친구에게 편하게 전화할 수 없습니다. 그가 받을 괜한 오해를 걱정해야 합니다. 자유민주국가는 헌법에만 있습니다.

공수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리했는지를 말하지 않습니다. 공수처 내부 정보나 검찰 문서가 어떻게 언론사로 흘러갔는지를 추적하려고 마구잡이로 통신 정보를 수집한 것으로 추정될 뿐입니다.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한다’는 걸 조직 목표로 삼았던 동독의 정보기관 슈타지는 ‘당의 창과 방패가 된다’는 나름의 거창한 명분이라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공직자 부패 추적도 아니고 고작 ‘내부 첩자’ 색출을 위해 헌법을 유린한 것이라면 공수처는 사라지는 게 마땅합니다. 고쳐 쓸 수 없는 게 세상에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