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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안혜리의 시선

자꾸만 선을 넘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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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예능에서도 지켜야할 선이 있다. '스걸파'의 한 출연팀이 그 선을 넘었고, 논란이 확산됐다. 딱 지금 우리 사회의 축소판같다. [사진 방송 캡처]

예능에서도 지켜야할 선이 있다. '스걸파'의 한 출연팀이 그 선을 넘었고, 논란이 확산됐다. 딱 지금 우리 사회의 축소판같다. [사진 방송 캡처]

어떻게든 이겨보겠다고 자꾸만 선을 넘는다. 짐짓 말리는 시늉이라도 해야할 어른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방관하며 선 넘기를 암묵적으로 부추긴다. 결국 이런 나쁜 의도를 간파당해 비난이 폭주하는데도 깔끔하게 사과하는 대신 "선한 의도를 의심하지 말라"고 오히려 발끈한다. 남을 밟고 비열하게 원하는 바를 기어이 얻어내지만 이 과정에서 불필요한 갈등이 증폭되고 공정과 신뢰라는 주요 가치는 훼손된다.
지난 28일 밤,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화제성 높은 예능 프로그램인 Mnet의 '스트릿댄스 걸스 파이터'(스걸파)가 우연찮게 우리 사회, 특히 우리 정치판에서 매일매일 벌어지고 있는 고구마처럼 답답한 현실을 압축해서 보여줬다.
스걸파는 댄스 열풍을 몰고온 '스트릿댄스 우먼 파이터'(스우파)에 출연한 프로 댄서들이 여고생 댄스팀을 맡아 멘토링해주며 최종 우승자를 가려내는 경연 프로그램이다. 이날 방송은 결승으로 가는 길목에서 12개 팀이 1대 1로 짝을 이뤄 대결한 후 패한 팀은 반드시 탈락하는 데스매치로 이뤄졌다. 똑같은 노래에 각각 절반씩 안무를 짜 평가받는 거에 더해 '안무 트레이드(교환)' 미션이 주어졌다. 일부 안무 구간은 반드시 대결을 벌이는 상대팀이 준 안무를 그대로 넣어야 하는 게 룰이었다. 내가 잘 짜고 잘 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가 돋보이지 않아야 유리한만큼 경쟁팀이 주어진 짧은 시간 안에 따라하기 어려운 압도적 테크닉을 넣거나, 거꾸로 아예 멋 없는 평이한 동작을 주는 방식 등 팀마다 다양한 전략을 들고 나왔다. 비슷한 '꼼수' 대결을 펼친 셈인데, 방송 후 유독 한 팀(클루씨)만 집중포화를 맞았다. 이유가 있었다.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은 탓이다.
클루씨는 상대팀(스퀴드)에게 따라하긴 어렵고 우스꽝스럽기만한 동작을 줬다. 이젠 개그맨 장도연도 더이상 하지 않는다는 보기에도 민망한 꽃게 춤, 그리고 무릎이 갈려나갈 만큼 고난도의 프리즈 동작이 산만하게 뒤섞인 안무였다. 사실 안무라기보다 장난에 가까운 이상한 포즈의 집합이었다. 이에 반해 지극히 정상적인 안무를 짜준 스퀴드는 "장난하나 싶어 화가 났다"면서도 묵묵히 미션을 완수했고, 노래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동작을 소화하느라 진을 뺀 탓인지 결국 패했다.
눈 앞의 승리에만 집착해 무리수를 두긴 했지만 아직 어린 나이에 감당해야할 경쟁의 무게를 감안할 떄 클루씨만 비난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멘토를 맡은 라치카의 방조였다. 대결 후 다른 팀 멘토들이 조심스럽게 "아무리 경쟁이라도 누군가의 발목을 잡고 올라가는 건 아니다"라고 충고했을 때 역시 사과 대신 "상처주고 끌어내리고 발목 잡으려는 의도가 아니라 재미있게 하고 싶은 게 컸다"라며 반박에만 열을 올렸다.
딱 요즘 우리가 겪는 현실의 축소판 같았다. 심지어 대등한 경쟁도 아니고 이미 권력을 가진 자들이 어떻게든 남을 밟고 올라서서라도 계속 권력을 손에 쥐겠다고 자꾸만 선을 넘으니 하는 말이다. 그걸 들켜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말도 안 되는 헛소리로 변명하거나 아예 입을 닫아 버리는 것도 똑같다. 1970년대도 아니고 무려 2021년에 이젠 대체 왜 만들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공수처가 언론·정치·민간 사찰을 하는 현실을 겪는 것만으로도 견디기 어려운데, 아무도 잘못했다는 사람이 없으니 기가 막히다. 문재인 대통령이 그렇게 공을 들여 공수처 도입을 성사시켜놓고는 공수처의 사찰 의혹에 대해선 왜 침묵하나. 혹시 『문재인, 김인회의 검찰을 생각한다』의 공저자이자 '공수처 신설로 검찰을 감시하자'는 현 정부의 검찰 개혁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친문 김인회 인하대 교수를 정치적 중립성이 중요한 감사원의 신임 감사위원에 대놓고 임명함으로써 일련의 선 넘기에 암묵적으로 동의한다는 걸 보여주려는 것일까. 사실 공수처뿐만이 아니다. 일자리는 기업 아닌 정부가 만든다며 수시로 기업 발목을 잡더니 이제 와서 바쁜 대기업 오너들을 청와대로 소집해 우스꽝스러운 영상이나 찍게 하며 실패한 일자리 정책 책임을 전가하는 식으로 또 선을 넘는다. 이 정부의 염치없는 선 넘기는 일일이 열거하기도 벅차다.
그런 점에서 스걸파 지난 방송은 현실을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다르기도 했다. 작금의 현실에선 빈번하게 선 넘는 행태에 아무런 브레이크가 없지만 스걸파는 달랐다. 멘토 허니제이는 라치카와 달리 고난도 브레이킹 동작이 특기인 자기 멘티 팀(브레이크 엠비션)에게 "단기간에 상대팀이 해낼 수 없는 테크닉을 주는 건 너희와 어울리지 않는다"며 "서로 배려하는 예쁜 경쟁을 하라"고 조언한다. 공정과 염치를 아는 멘토의 조언 덕분에 이 팀은 논란없이 가장 많은 박수를 받았다.
청와대든 여당이든, 심지어 정부조차 허니제이처럼 선을 지키는 어른 하나 보이지 않는다는 게 지금 대한민국의 비극이 아닌가 싶다.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스걸파, '무매너 논란'과 닮은 현실 #공수처 사찰 등 선 넘는 文 정부 #춤판에도 있는 공정·염치 실종돼